사랑 노래를 들을 순 있지만, 사랑을 할 순 없어
몇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어느 한때 자신이 낙오자 내지는 패배자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본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38쪽)
너무 평화로워. 모든 나쁜 것은, 해로운 것은 죄다 아주 멀리 있고, 좋은 것들만 나와 함께해. 아니, 그런 기분이 들어. 어, 여긴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족관이야. 근데 나 더 이상 여기 못 있겠어. 못 견디겠어. 나 망했나봐. 이 안에서 나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아. (339~340쪽)
우엘벡의 <투쟁 영역의 확장>이 출판된 시기는 1994년. 김사과의 <천국에서>는 2013년에 나왔다. 20년의 시차를 넘어 두 소설의 단어는 닮아 있었다. 망했다, 실패했다. 갓 서른이 된 프랑스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나’와 한국의 이십대 초반 대학생 ‘케이’. 두 사람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두 인물은 세계를 둘러보는 관찰자로서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살아있다’는 감각이 부족하다. 무언가를 느끼기에 세상은 지나치게 완벽하다.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풍요롭고, 우리는 평온하다. 미지의 공간이 남지 않은, 투명한 세상을 떠돈다.
한편, 사람들에 의해 추천됨으로써 은밀한 매력을 잃은 장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로 재포장되었다. 여행자들은 한편으로 트렌드를 쫓으며, 한편으로 가장 독특한 것을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탐험할 것이, 어떤 새로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미 발견되었고, 재발견되었다. (95쪽)
두 인물을 지배하는 감각은 권태다. 우리는 완벽함을 얻는 대신 지루함이라는 치명상을 입는다. 지루함은 세계에서 우리가 할 일이 없음을 의미한다. 설사 반전을 꾀하더라도, 판은 뒤집히지 않는다. 세계를 경험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안전한 모험을 택한다.
지루함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물건과 서비스를 사들인다. 날마다 쏟아지는 새것 사이에서 기꺼이 길을 잃는다. ‘무엇을 사는 편이 더 나은가’ 라는 주제로 고민을 거듭한다. 선택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한 자유로 얻는 것은 예상 가능한 즐거움과 편의다.
실제 그의 생활이 극도로 기능적이라는 사실을 나는 곧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15구에 있는 원룸에서 살고 있었다. 난방은 관리비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잠만 자고, 일은 거의 밖에서 했고, [마이크로-시스템]을 읽고 있었다. 그가 말한 <자유의 단계>는 자신의 저녁 식사를 미니텔로 선택하는 것으로 요약되었다. (그는 이 최신식 서비스에 가입했다. 이것은 더운 음식을 정확히 한 시간 내에, 혹시 늦더라도 지연 시간을 최대한 단축해서 배달해 준다.) (49쪽)
소비는 새로운 지평을 열지 않는다. 권태를 잊으려고 증식에 증식을 거듭할 뿐이다. 자본은 상상하지 못한 필요를 자극해 끝내 모든 가치를 장악한다. 가령 음식은 허기를 채우는 대상에서 입맛을 감별하는 기준이,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상징이 된다. 이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다.
“(중략) 요즘 우리 동네로 오는 애들은 그런 후진 식당에는 관심도 없어. 왜냐고? 거기는 공정무역 커피를 안 쓰니까. 유기농 달걀로 오믈렛을 만든다고 써붙이지 않았으니까. 채식하는 사람들을 위한 초콜렛 스프레드가 없으니까. 그리고 아저씨들이 땀 냄새를 풍기면서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며 야구 경기를 보는 데는 가기 싫다는 거지.” (66쪽)
모든 것이 갖춰진 상황에서 우리는 배고픔을 고민하지 않는다.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자신의 운을 박차고 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정말로 혹독한 모험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20세기에 발명된 멋진 삶의 양식(97쪽)” 끝자락에 매달린 채 몸부림친다. 하지만 괜찮다. 아직 마지막 보루가 남아 있다.
그 소시민적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취향을 선택했다. 마치 속물들이 아파트와 자동차의 브랜드로 서로를 재듯이, 그들은 세련된 것들의 목록을 끝도없이 늘리며 자신들을 방어하는 한편, 또한 벗어날 수 없는 자신들의 출신계급을 향해 무해한 공격을 시도했다. (144쪽)
<천국에서>의 케이는 세련된 취향에 무심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러나 무심함은 무력함을 포장하는 몸부림이다. 이들은 축축한 현실을 피해 취향이라는 고급스러운 껍데기 안으로 들어간다. 케이는 가족의 장례식을 치른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슬픔에 젖지만, 술에 절어 죽은 이웃의 사연을 읊는 남자친구의 마음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불쾌감이 엄습해 왔다. 해적들의 집에 묵으면서 해적 소스를 뿌린 에스칼로프 요리를 먹으러 가고, 그들의 어린 딸이 <선원> 스타일의 유흥장으로 춤을 추러 가는 것을 상상해 보시라. 짜증 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128쪽)
자본은 두려움조차 매끄럽게 세공한다. 위협적인 대상은 접근 가능하게 다듬어진다. <투쟁> 속 나는 광고와 각종 정보 기술에 둘러싸인 삶에 신물을 느낀다. 그는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추가적인 지식 따위가 아니(99쪽)”라는 사실을 안다.
우리에게 삶은 너무나도 쉽다. 모든 것이 이미 말해졌고, 모든 것이 이미 행해졌다. 자본과 정보화가 장악한 현대화된 삶은 세련미를 갖춘 사물과 쿨한 관계로 점철된다. 그 과정에서 삶의 시간과 공간은 컨셉화된다. 취향의 목록이 늘어날수록, 삶은 한없이 얄팍해진다.
수족관 속에 있는 물고기가 수족관을 부수면 어떻게 돼?
죽겠지. 뻔하지. 하지만 수족관 속에 있는 건 살아 있는 거야? 그래, 나는 이게 묻고 싶은 거야. (중략)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여기서 나가본 적이 없거든. 솔직히 여기가 안이라는 것도 몰랐어.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어. 바깥이라는 게 있어? (339쪽)
지루함은 소비와 취향으로 잊을 수 있지만,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공허함이다. 공허함은 세상을 인터넷 서핑하듯 유영해서는 벗어날 수 없다. <투쟁> 속 ‘나’와 <천국>의 케이는 세상과 유리돼있다. 유리는 투명한 창을 통해 위험으로부터 격리된 채 타자를 본다.
분리는 다르다. 분리는 타자와 부딪치면서 그를 인식하게 한다. 소설 말미 <투쟁>의 ‘나’는 자연을 향하고, <천국>의 케이는 자신과는 계층이 다른 지원에게 향한다. 세상을 관망하던 그들은 부딪치는 쪽을 선택한다. 이곳과 저곳을 가르는 유리창을 부순다. 공허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녀는 확실히 사랑할 줄 알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나는 그녀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다. 희귀히고 인위적이며 때 늦은 현상인 사랑은 특별한 정신 상태에서만 꽃필 수 있다. 즉 모든 면에서 현대를 특징 짓는 관습들의 자유로움에 대립되고, 드물지만 하나로 결합된 그런 특별한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136쪽)
접촉은 깨부숨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이 편리함을 포기할 수 있을까. 잡음 없이 아름답고, 양식화된 삶을. 액정 너머 원할 때 연결하고, 싫을 때 끊어버리는, 이 매끄럽고 기분 좋은 행동을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바깥에 손을 뻗을 용기가 내게 남아 있는지. <천국>으로부터 5년이 지났다.
미셸 우엘벡, 용경식 역, 『투쟁 영역의 확장』, 열린책들, 2003
김사과, 『천국에서』, 2013
*발췌의 경우 빨간색은 『투쟁 영역의 확장』, 파란색은 『천국에서』 로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