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출산을 생각하다가
사내는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내는 자신 혼자 오로라를 보러 가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사내는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일찍이 제눈으로 오로라를 보고 싶었다. 아내에게 다시 말했다. 오로라를 보러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아내는 물었다. 오로라가 보고 싶은 건지, 오로라가 보이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건지.
삼경을 떠도는 시간. 클럽하우스의 시를 낭독하는 방에 갔다가 시 한 편을 들었다. 임경석 시인의 ‘플라스마’라는 시였다. 헤르베르트 그라프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닌 사람이 화자다. 아름다웠다. 우리는 매 순간 삶을 살아가지만, 삶에서 원하는 것조차 결코 알지 못한다는 메시지처럼 들렸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면서 원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결혼이 하고 싶다. 생득적 가족이 아닌, 내가 꾸리는 가정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기를 낳고 싶으면, 결혼은 해야 한다. 혼자 낳고 기를 자신은 없으니 남편은 필요하다. 반영속적인 파트너에게 심리적 안정을 찾고, 경제적 안정도 느끼고 싶다. 그런 그를 사랑하기까지 하면 더할 나위 없지. 사랑이 제일 뒷전이네. 초라하다.
“결혼하려면 서로 잘 알아야지. 잘 모르면서 결혼하고 그렇게 그냥 살고.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엉망으로 사니? 모르면 결혼하면 안 돼. 어차피 해도 실패야.”
-영화 <풀잎들> 중 아름의 대사
결혼과 출산에 초조하던 와중에 머리를 맞았다. 탄식이 뒤섞인 호통에 이상하게도 엉켜있던 마음의 타래가 내려간 기분이었다. 결혼을 할 정도로 상대를 잘 알고 있을까 자문하니 내 자신이 안일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모르면 결혼하는 거 아니래, 라고 말했다. 스스로 초조함을 달래려는 자기암시였다. 나는 그에 대해 잘 몰랐다. 모른다고 생각하니 모르는 것들 뿐이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피상적인 것들 뿐이었다. 사랑을 하는지는 몰라도, 서로를 모른다. 잘 모르고 결혼하면 인생이 망가진다. 늦은 밤 본 영화 한 편에 위안과 숙제를 한데 얻었다.
종종 친구들과 결혼과 아이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이 중차대한 일에 어울리는 진중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았다. 출산에는 별다른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고, 결혼에 대한 생각은 구식이었고, 사랑에 대한 생각은 그 사이 어딘가를 모호하게 헤매고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을 합리적 근거는 무수히 많은데, 아이를 낳고 싶다는 흐릿한 욕망은 해설할 수 없었다.
지난주, 재개봉한 영화 <클로저>를 다시 보았다. 댄의 대사가 유독 꼴 보기 싫었다. “난 진실에 중독됐어”. 카페인도, 알코올도, 니코틴도 아니고, 중독될 게 오죽 없으면 진실, 그것도 사랑의 진실에 중독되나. 혀를 찼다. 그는 앨리스에게 망할 진실을 요구하면서 말했다. “진실이 없다면 우린 그저 평범한 동물일 뿐”이라고.
그대로다. 인간은 약간의 이성을 가진 평범한 동물이다. 댄은 사랑의 면면을 낱낱이 밝히고 싶어했지만, 사랑은 진상조사가 필요한 사건이 아니다. 자기 안에서는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더 잘 사랑하기 위한 성찰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연인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건 다른 문제다. 앨리스는 말한다. “사랑이 어디 있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어.”
실증할 수 없는 사랑에 진실을 요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랑의 진실은 믿고 싶어하는 마음 자체에 있다. 그리고 댄을 비난했지만, 그처럼 나도 결혼과 아이에 대한 나 자신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계속 헤집어서 나온 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이유’를 기술한 10장짜리 보고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버둥거리는 자아와 남들의 삶을 모방해 안심하려는 심리적 욕구와 영속적 생을 꿈꾸는 DNA 사이 한 인간이었다.
다시 <풀잎들>. 아름은 식당에서 만난 동생 커플에게 잘 모르면 결혼하는 거 아니라고 호통치고, 거리를 걸으며 따뜻한 실내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창밖에서 바라보고, 카페의 한 구석에서 타인을 향한 미욱한 욕망을 어설프게 감추면서도 빈틈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거리를 둔 채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런저런 단상을 늘어놓던 아름은 영화 말미, 그 어리석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간다. 어우러진다.
제하고 싶은 말을 다 토해내는 아름이 멋있었지만, 외롭게도 보였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저 덜 쓸쓸하게 걷고 싶다. 삶은 오로라를 보고 싶은 건지, 오로라를 보러 외따로 떨어진 곳으로 떠나고 싶은 건지, 오로라를 보러 함께 갈 누군가를 원하는 건지도 구분하지 못한 채 진행되는 것일지 모른다. 안일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사는 일은 원하는 형태를 향해 명징하게 다듬고 가꾸는 분재 관리보다는 생태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잡초를 뽑고, 몇몇 벌레를 내쫓는 정원 돌봄과 유사하다고.
삶에서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중요하지만, 정작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에는 이유가 없다. 아무리 ‘왜?’라고 물은들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진실. “살면서 정말 중요한 일들 중에 내가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건 없는 것 같아.“ 요즘 퍽 귀엽게 본 영화 <옥희의 영화>에 나오는 교수의 대사다. 동감한다. 무엇보다 제 기준이 명확하면 모를까, 나처럼 살고 싶은 인생, 하고픈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막을 밝히려는 건 어불성설이다.
사랑하는 이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어, 라는 마음을 더는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은 분명 느껴지지만, 막을 수도, 벗어날 수도, 컨트롤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거니까.* 이제 할 일은,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만날 때 솜털을 세우는 것뿐이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피부를 스칠 때, 그 막연한 감각을 놓치지 않도록 솜털을 세우고 있어야겠다.
*최근에 조승연의 탐구생활 유튜브에 나온 카를라 브루니의 인터뷰를 인용했다. 그녀의 노래 ‘quelque chose (어떤 것)’에 대한 조승연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그녀의 섬세한 답변에서 삶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https://youtu.be/zXVm6yOBDl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