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벚꽃이 없었다면
그러하다면
봄을 맞는 마음은
평안했을 것인데 1)
정욕이나 사랑은 항상 봄과 연결된다. 봄은 기껏해야 3개월 남짓이다. 기온이 높아지면서 그나마도 오롯한 봄은 2개월로 짧아진 수준이다. 좋게 말하면 화사하고, 나쁘게 말하면 부산스러운 계절. 매해 돌아오는 봄이지만, 그럼에도 작년에 폈던 벚꽃이잖아, 라고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선형적 시간을 사는 인간으로선 해마다 스치는 봄을 붙잡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봄은 인생에 비유하면 역시 20대다. 30대를 청춘이라 부를 순 없다. 자조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주제를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물론 제 인생에 대해선 이렇게 단정 짓더라도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는 금물이다. 가령 젊은 연인들을 보고 “좋을 때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정작 그들은 자신들이 좋을 때라고 생각할까?
말간 얼굴의 스무 살 청춘들을 보고 ‘좋을 때’라고 표현할 때에는 그러한 시절은 한정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젊은이로서 한바탕 사랑을 할 수 있는 인생의 찰나 같은 시기. 이 관점에선 그 시기가 지나간 뒤에도 연애를 할 순 있지만, 최적의 때라 보기엔 어렵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은 어떤 사건이 운에 달려있다는 말이 아니다. 해프닝을 히스토리로 만들려면 준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곧 연애는 청춘에 허락된 한정판이고, 타이밍을 제 것으로 만들 준비까지 필요하다. 곧 <지금>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로서 사랑할 수 있는 최선의 순간이다. 사랑을 나눌 시간이 한정돼 있다면, 기꺼이 헤프게 사랑하는 것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물론 세상의 시선과 내면의 욕망은 항상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진 않는다. 인간의 욕망을 다룬 한 트렌드 관련 서적에는 한 나이 든 여성이 시니어 카페에 가입한 일화가 나온다. 가입 첫날만 70여 통의 러브레터를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의 주변엔 연애에 목마른 남성들이 가득했다. 인생의 어느 시점이든 사람은 타인의 온기를 갈구한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와 줄 수 있어요? 섹스는 아니고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거 말이에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켄트 하루프, <밤에 우리 영혼은>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사람과 달리 치기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욕구를 투명하게 응시하고,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백하게 전할 줄 안다. 하지만 세상의 시선은 또 별개라, 그들을 향한 손가락질은 노인의 욕망을 좌절시킨다. 얼핏 안온해 보이는 일상에도 장애물은 가득하다. 살아온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관계 속 상처들이 그렇다.
맥주 한 잔에 다시 취하네
17살 우리에게 심각할 게 뭐 있으리
보리수나무 아래 우리 두 사람
-영화 <영앤뷰티풀> 중에서
반면 청춘은 자신이 ‘좋을 때’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스로 상처를 낸다. 육체의 열정만 앞선 탓이다.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영앤뷰티풀> 속 이자벨이 그렇다. 17세의 이자벨이 처연해 보였던 건, 그가 그토록 아름다운 ‘좋은 때’를 적절히 소화할 능력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겐 몸의 열기와 이를 시험해 보고픈 마음만 가득하다. 사랑이 결여된 몸만이 남아 감각을 탐색한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은 사랑 앞에서 좌절한다. 몸이 마음 같지 않아서, 마음이 생각대로 안 되서, 혹은 세상과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가까스로 찾아온 사랑을 눈앞에서 놓치거나 스스로 망가뜨린다.
가까스로 옷깃을 스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연애를 시작한들, 인생의 고민은 그새 다른 장을 열어준다. 봄의 찬란함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분을 마친 꽃과 벌은 생각한다. 꿀과 가을의 열매를. 꽃술을 설치고 다니던 화사한 노동은 모두 결실을 기약한 행위다. 가을을 고대하는 온건한 행복은 연분홍 꽃잎이 뺨을 스칠 때의 애틋함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봄의 너머가 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사람과 가을과 겨울을 다 맞고 싶은데, 도무지 봄이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가 보고 싶은 건 꽃잎이 떨어진 자리를 찢고 나오는 신록과 그 녹음이 바래는 추이인 걸. 올봄 난생처음으로, 설렘은 이제 그만 느끼고 싶다고 생각했다. 설렘이 권태롭게 느껴졌다.
봄을 끝내고 싶다면 가을을 위한 추수를 하거나, 혹은 이곳의 봄을 내팽개친 채 다른 봄으로 떠나는 법 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나는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순환고리 외 다른 이야기의 구성을 알지 못한다. 모티브가 제시된 뒤 변주를 거쳐 대단원에 이르는 소나타 외 인생에 어떤 형식을 갖다 붙여야 할지 알지 못한다.
나의 편협한 생각엔 연애가 결혼에 비해 일상보단 여행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 사람과 사랑을 종단할 수 없다면, 사랑의 면면을 횡단하겠다는 얄팍한 심보가 생긴다. 그건 한 길을 내내 걷는 게 아니라, 횡단보도에 서서 마음에 든 누구든 손을 잡고 이쪽저쪽으로 건너는 그림에 가깝다. 누구하고든 연애만 하겠다는 뜻이다.
눈앞에 놓인 세 가지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다. 가장 어렵겠지만, 연애가 사랑의 봄이라는 진부한 사고방식을 고칠 수 있겠다. 혹은 사랑의 가을이 인생의 반려를 찾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한 채 다시 한번 상대와 이야기 나누는 방향도 있겠다. 혹은 현재의 봄을 접고, 다시 익숙한 설렘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도 있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인연> 중 ‘인연’에는 아사코와 세 번 스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아사코와 벚꽃 같은 찰나의 추억만을 가졌고, 세 번째 만남에는 ‘백합 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2)을 보았다.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3) 아사코의 얼굴은 겨울에 비유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헤어진 연인의 이야기를 한참이 지나 듣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는 아사코에게 처음엔 안데르센의 동화책을, 이후엔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을 남겼다. 아사코는 그에게 작은 손수건과 반지를, 이후엔 <셸부르의 우산>이 떠오르는 연둣빛 우산을 잔상으로 남겼다. 짧은 봄에도 그들 사이에는 작은 추억들이 떨어진 벚꽃잎처럼 남았다. 우리가 이별한다면, 서로에게 무엇을 남기게 될까.
*인용자료
1)정순희, 일본인의 미의식과 정신, ‘지와 사랑’ 62p,
보고사, 2007
2,3) 피천득, 인연, 샘터, 2002
*표지 @agathemarty,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