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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귀촌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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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들 seondeul Aug 26. 2019

귀촌일지

사진편_늦겨울부터 봄까지_필름

2월에서 4월 사이에 라이카 미니로 찍음



8월인 지금엔 현실감이 없는 눈 내린 마당부터
눈 같은 꽃이 내린 여름까지



게을러도 너무 게을렀다. 시간이 머리 위를 날라, 벌써 긴 겨울이 쫓아온다. 방학이라 여러 특강들을 해내고, 난생처음 긴 운전에 앓아눕기도 했다. 분명 분주하게 무언가를 만들어냈는데, 어딘가 모르게 영혼의 바람이 빠져나가고 있다.  한두 장씩 쓰던 일기도 소홀했고, 카메라도 좀 방치했다. 이렇게 오래 책을 안 본 적이 있었나. 


곧 가을걷이로 바쁠 때다. 고추도 말리고 있으니 들고 방앗간에 가야 할 테고, 산에서 밤과 은행도 주워오면 보관해두어야 한다. 사랑하는 계절을 맞아, 갉힌 영혼을 자분자분 메꿔보려 한다. 서랍에 넣어두었던 필름을 한꺼번에 받아보았다. 거기에 내 겨울부터 여름이 다 있었다. 


다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고...




아득한 2월. 눈사람이 있어도 괜찮을 때.

나의 일터. 




고작 몇 달 전인데, 너무 옛날 같고 아득하다. 겨울 냄새가 잘 기억이 안 난다.





동물 발. 사람 발. 겨울이라 쉬고 있는 장화들. 신고 나갈 때 편하게 양말을 안에 넣어둔다. 




딸기 꽃을 한 송이씩 넣어 팔아서 홀린 듯이 샀다. 포근한 햇볕에서 같이 일광욕 하기.





날씨가 많이 풀려서 볕은 따뜻하지만 밖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산의 바닥은 아직 바삭거린다. 



집 앞 산책길의 2월과 4월. 온통 갈색빛이지만 잘 찾아보면 작고 붉은 열매가 있다. 황량한 숲에서 견디고 있는 것은 위로가 된다. 두 달 새 바닥이 푸르러지고 밥풀 같은 꽃들이 터진다. 


엄마 아빠. 왼쪽은 2월, 오른쪽은 5월. 5월의 산책길은 바닥이 질어서 꼭 장화를 신어야 한다. 뱀도 나올 수 있어서 꼭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을 치며 걸어야 한다. 



 

겨울 가지와 봄 가지. 




겨울나무와 봄 나무. 겨울나무는 뭐가 궁금한지 고개를 갸우뚱. 




겨울이 끝나갈 쯤엔 쪽파를 심는다. 동네 한 바퀴 구경하다가 줄 맞춰 심어놓은 쪽파를 봤다. 

 한 달 새 통통해진 애들. 비닐로 씌워두고 심어두지 않은 곳에서는 냉이가 삐죽 올라왔다. 땅은 두면 뭐라도 난다.  지금 보니 너무 맛있겠다 냉이... 고기와 함께 먹으면 긴 겨울에서 깨어날 힘이 난다.  






4월. 완연한 봄이다. 꽃을 쫓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비가 올까 봐 조마조마하다가 다행히 인사를 나눴다. 벚꽃이 피면 의식처럼 무심천엘 간다. 대학생인 엄마도, 고등학생인 아빠도 걸었던 길을 걷는다. 엄마 아빠는 고향이지만, 나는 처음 살아보는 도시이다. 그러니 더 잘 보이는데, 청주는 만사가 애매하다. 위치도 인구도 말투도 모든 게 애매하다. 아무 맛도 안나는 슴슴한 동치미 같다. 간이 안된 일상을 보내다 보니, 얕은 여행에도 앓는 체질이 되었다.   






무심천 벚꽃은 옆으로 늘어지는 나무라면, 조치원은 위로 크다. 따로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품종이 다른 건지, 꽃도 좀 작다. 차를 타고 구경하면 끝없이 소리 지를 수 있다. 자주 지나다니는 길 너머에 여기 조치원 벚꽃길이 있는데,  멀리 서는 수평선으로 보인다. 낙엽이 지면 그 선이 타오른다. 겨울보다 먼저 내려앉은 노을 같다. 발이 시린 걸 보니 만날 날이 머지않았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앵두꽃_귀촌일지 사진편 봄 이야기

앵두나무가 올해도 거지주머니병에 걸렸다. 애초에 다 따버렸더니 오히려 큰 열매가 많이 열렸다. 항상 다 나쁜 건 없다. 그림 그리러 오는 애기들이 올 때마다 나무 앞에 서서 서너 개씩 따먹었다. 많은 입에 골고루 들어가 기뻤다. 맨 가지였을 때부터 언제 앵두가 달리냐며 조르고, 조그만 꽃이 핀 가지에 코를 묻으며 열매를 기다렸는데, 때를 놓쳐 못 먹은 친구도 있다. 어쩔까, 지는 건 금방이네.



5월에 딴 앵두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복숭아 꽃_귀촌일지 사진편 봄 이야기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목련 꽃_귀촌일지 사진편 봄 이야기

꽃잎을 보고 알새우칩 먹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려야만 비로소 따뜻한 날이다. 목련이 필 때는 햇살도 아삭아삭하니까. 마른 나뭇가지에 댕글 하게 달려있는 목련꽃은 한복의 치마와 닮았다. 작약도 그렇고, 큰 꽃은 눈에 잘 띄지만 그만큼 빨리 진다. 청초하던 꽃이 누렇게 변하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게 애처롭다. 


사진 속 목련이 달겨드는 듯하다. 나에게 봄은 제발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계절이었다. 밖은 복작하고 모든 게 깨어나는데,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면 어딘가가 할퀴는 마음. 기억이 희미한 걸 보니 올해는 무사히 흘러갔나 보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성숙해지길 기다렸는데 겪어보니 좀 별로다. 노력한 과거의 나에겐 미안하지만 이렇게 와보니 그렇다. 











그리고, 서울 한 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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