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읽은 21권의 책
겨울의 독서노트 https://brunch.co.kr/@chocowasun/79
봄의 독서노트 https://brunch.co.kr/@chocowasun/87
여름에 본 4권의 소설, 8권의 산문, 9권의 시 그리고 2편의 영화.
사랑의 역사_니콜 크라우스
거시적이자 미시적으로 짜인 직조물. 슬픔 한가닥 기쁨 한가닥 땋아 내린 타피스트리.
마지막 장면을 위해 달려간다. 한국 버전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같다. 김연수의 추천사가 괜히 쓰인 게 아니네.
일곱 해의 마지막_김연수
예약주문을 걸어놓고 기다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지 않아 슬프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 작가가 꼬아놓은 시간의 선을 기꺼이 따라가게 한 건, 유려한 비유와 부서질 듯 섬세한 감정선이다. 소제목만 읽어도 마음이 아팠던 때가 있었다.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밀려온 그때의 기분이 애틋하여 다시 들추지 못할 만큼.
백석은 마치 악뮤 아이유처럼 만인이 좋아하여 좋아한다고 말하기 머쓱할 정도이지만, 많이 좋아한다. 건드리면 터질 각오로 부풀어 올랐던 고등학교 시절, '흰 바람벽이 있어'는 매일 보는 곳에 붙어 가느다란 버팀목이 돼주었다.
그런 백석과 김연수라니. 전 작품 중 굳빠이 이상이 와 닿지 않았던 터라 반신반의했지만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맛도 안나는 게 내 탓인가 돌아보게 되지만, 이번 건 아닌가 보다. 이런 식의 소설이 당길 땐, 매운맛으로 김영하의 검은 꽃을 한 번 더 읽겠다.
덧) 종이 냄새가 특별히 좋다. 장마철 풀벌레 소리와 함께 기억될 향기.
해리포터와 불의 잔 1_조앤 k 롤링
해리도 나도 스마트폰이 없던 때라 옴니큘러 같은 게 신기했겠지.
순차적으로 풀리는 떡밥을 줍는 정주행러의 마음.
하울의 움직이는 성 1 _다이애나 윈 존스
초등학교 때 사둔 책을 아직도 본다. 다시 봐도 소피는 생각보다 고집쟁이에 민폐 장난 아니고, 하울은 허세 난리에 찌질 그 자체다. 그래서 둘이 짝짜꿍이다. 러브라인은 뒤에 열 페이지 정도 미세하게 나오고 서로 싫어하기만 한다. 영화와는 정말 다르고, 특히 책 속의 일러스트를 보면 으스스한 분위기가 더 산다.
좋아하는 장면이 생겼다. 움직이는 성의 문을 열면 작은 정원이 나오고, 소피가 행복해하며 둥둥 떠다니는 양동이를 데리고 마이클, 하울과 함께 꽃을 꺾어다 판다. 그리고 정원에서 질투하는 소피가 나오는 부분도.
길 잃기 안내서_리베카 솔닛
이런 글 쓰고 죽을 수 있다면... 지내온 삶과 써내는 능력이 부러워서 침을 줄줄 흘리며 읽을 수밖에 없다. 푸름에 대한 연서. 이 책 자체가 하나의 ‘슐’이자 안내서다. ‘늘 먼 곳에 있는 푸른색’으로 글씨가 쓰여있다. 먼 곳의 것도 가까이 가보면 푸르지 않듯 글씨도 서서히 검어졌다면 멋진 은유가 되었을 테다.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1,2 _현각
중학교 때 보고 잊었던 걸 다시 봤다. 1권은 아주 좋다. 진리를 찾아 행하는 사람의 맑은 족적. 가르침 부분은 좋아하는 교수님의 말과 같았다. 좋은 것 끼리는 다 통하는구나.
큰 스님은 "내 말을 믿지 마라. 너 스스로 너 자신을 알아야 한다. 오직 수행하라. 나는 단지 여러분의 본 성품을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것을 찾아줄 수 없다. 당신 스스로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쇼팬하우어조차도 이렇게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는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 의식에 대해 '얘기'하고 생각에 대해 '얘기'하고 삶의 의지(will)에 대해 언급했지만 자기의 가르침으로부터 독립해 그것을 어떻게 각자 자기의 것으로 만들 것이냐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생과 사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했지만 그 진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마라. 그것을 철저히 검토하여 그것의 진리를 재발견하라."
"나는 너희들에게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니라."
저 불빛들을 기억해_나희덕
모든 게 아름다웠던 여행지에 다시 가고 싶지 않다. 이전의 산문집 '반통의 물'은 팔에 털이 솟을 정도로 좋았었다. 어쩐지 두려움에 읽었다. 반통의 물에서는 지금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주였지만, 여기선 떨어져 회상하는 느낌이 강했다. 몇몇 부분은 마음 깊이 읽지 않고 넘겼다. 아우라가 없어 슬펐지만 그 또한 좋았다.
검은색_알랭 바디우
soso... 기대하던 검은색에 대한 단상은 아니었다.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_심보선
서문과 바로 이어지는 '영혼의 문제'를 읽고 나면, 비 오는 테라스에 앉아 뱃속까지 타고 내려가는 맥주 한 잔 딱 들이켠 기분이 든다. 이성에 감성을 싸악 얹으면 딱 이 각이다.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다. 짧은 글을 엮은 거라 연속성은 없지만 골라 읽긴 아깝다. 말싸움하면 질 거 같다, 아니 진다.
일 년 만에 다시 집어 든 책을 읽으며, 그대로라 생각했으나 바뀌어버린 나를 발견한다. 충격받았던 '그을린 예술'을 다시 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_니콜라스 카
스크린 타임을 굳이 알려주는 알람 덕분에 흠칫할 때가 많다. 하루에 이 시간을 딴 것에 썼다면... 그림, 글, 일기, 책 읽기 하다못해 산책이라도 했으면.. 하며 편리함에 흠뻑 젖어 행복을 누리기도 한다. 나의 집중력 저하가 스마트폰 사용시간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자체 진단) 믿을만한 매체인 책에서 골랐다. 영상은 15초 앞으로 버튼만 넘기다 끝나버릴 테고, 인터넷 기사는 탭으로 오억 년간 남겨지다가 언젠가 지워질 테니.
나온 지 9년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도 적용된다. 한쪽 입장에서의 옹호가 아니라, 가능성을 양방향으로 열어두고 균형 있게 비교한다. 범위가 워낙 광범위하여 목차를 보고 궁금한 부분만 봐도 좋을 듯하다.
공부란 무엇인가_김영민
울타리가 없는 실험실 https://brunch.co.kr/@chocowasun/22
몇 년 전 이맘때 캠핑 의자에서 읽었던 소로의 '월든'. 딱 그때의 날씨가 돌아왔다. 통찰력에 버무려진 유머에 웃으며 책장을 넘겼었는데, 칼럼계의 아이돌 김영민의 글 또한 그렇다. 이 책도 나의 또 다른 아이돌, 지리의 이기상 선생님이 하는 강의를 들을 때처럼 소리 내 웃을 수 있는 곳에서 읽어야 한다. 한줄기 웃음이 필요할 때 권한다. 그러나 웃으며 말로 날 찌를 수도 있다는 점. '모호함은 때로 권력자의 무기이다'가 제일 웃기다.
덧) 그림 왜 넣었지 안 넣어도 될 텐데. 미인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나던 흥이 차갑게 식는다.
토론에 참여하지 않고 청강하는 학생 1이 될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입 떼지 못하고 앉아있는 게 손해처럼 느껴지게 끝난다. 현대소설론 수업에서 토론을 준비하고 이끄는 눈이 빛나던 교수님과, 어려웠던 토론 수업에 가만히 앉아있던 바보 같은 내가 떠오른다. 이 책에도 첫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밑의 글은 그 수업의 첫 시간을 듣고 쓴 일기이다.
2015.9.5.
세계는 ‘삶’의 차원 그리고 그것을 ‘논하는’ 차원으로 나누어져 있다. 삶의 차원은 곧 실행을 의미한다. 인생은 논하고 또 실행하는 차이에서 진행된다. 삶, 즉 실행의 차원에서 모순(paradox)이 발생한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추상의 영역으로 향한다. n+1차원의 세계에서 모순을 해석한다.
예를 들어보자. 텔레비전 속 축구를 하는 선수를 보며 우리는 ‘야, 왜 그렇게 차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논하는 차원이다. 그러나 실제의 차원에서 그 선수는 온갖 감각으로 축구를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수업, 소설론은 ‘논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소설론이라는 학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소설론을 공부하는 것은 논하는 차원이고 소설을 쓰고 읽고 느끼는 것은 실행의 차이이다.
소설론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논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운 후에, 실행의 차원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대학교 사 년 간 온갖 수업을 들으며 우리는 논하는 차원이 전부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 무엇 론이라는 자체가 실행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의 학문 영역이 되어버린 경향이 있다. 이번 학기는 소설론을 실행의 영역으로 연결시켜 보는, 실험적인 수업이 될 것이다.
‘나는 ~라고 생각한다.’라는 표현 방식은 어딘가 모르게 자신 없는 느낌이 든다. 대학에 와서 삼사 년쯤 글을 읽고 쓴 우리는 이 문장이 매우 촌스러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은 ~다.’라는 강력한 문장을 구사하게 된다. 이과정은 ‘나’라는 사적 영역에서 ‘모두’가 이래야 한다, 라는 공적 영역으로의 이동이다. 내가 모두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내가 모두로 발전하려면 근거와 논증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매 수업 시간마다, 과제, 리포트, 모두 질문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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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과 수업을 들으며 느낀 모든 공통점은 다들 수업보다는, 실행의 영역을 강조한다는 점이었다. 현대문학사의 온갖 사조를 한 학기 내내 읊던 교수님조차 문장의 띄어쓰기마다 삶에 대한 ‘태도’를 끊임없이 일깨웠다. 앞으로 남은 수십 년을 살며 한 톨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소설들과 시들을 우리가 읽고 배우는 이유는, 이를 통해 각자의 태도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위해 인문학을 배운다. 그것은 그 언제도 아닌 지금, 해야 하는 일이다.
「소설이라는 게 원래 실패에 대한 것이다. 세계 명작들을 보라. 성공한 사람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기껏 고생해서 커다란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상어들에게 다 뜯기고 뼈만 끌고 돌아온다.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와 『마담 보바리』의 보바리 부인은 자살하고 만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옛사랑을 얻기는커녕 엉뚱한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젊은 생을 마감한다.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수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것, 때로 위엄 있고 심지어 존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라.」 『말하다』_김영하
현대소설론 교수님 또한 일상에서의 적용에 그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오늘 수업을 듣는 내내 내가 좋아하는 교수님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역사를 보면 제재가 계속해서 밖에서 안으로 옮겨오고 있으며, 포스트모던을 살아가는 우리가 디자이너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실험해야 한다는 말들이 번뜩번뜩 떠올랐다. 앞서 말한 ‘~은~다’, 즉 모두로 확장된 공적 영역은, 스스로가 교과서를 만들어 내야 하는 시대라는 의견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과 관계하기 위해 오브제를 내어 놓는 사람들이다. 논하고, 또 실행할 수 있는 것을 배우고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만은 현시창). 나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며, 이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가 아님을 알고 있다. 더 가치 있을 수 있도록, 더 유익하게 스며들 수 있도록, 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가을과 겨울, 한 번 더 힘을 내봐야지. 오늘 오후의 강의실부터, 양말이 간절했던 때 든든한 동아줄 같았던 말들을 지나, 포스트 모던을 스치고, 내일을 다짐한, 오늘의 일기 끝.
당신의 아름다움_조용미
마늘꿀절임*(<기억의 행성> 중 '가을밤'_조용미)처럼 이 글자들이 녹아들길... 식물, 이별보단 무거운 죽음(흰색), 우주... 들뜬 기분일 때 다시 펴볼 것.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_조용미
무려 10년 전의 내가 사두었다. 제목의 시가 가장 와 닿는다. 제목을 고르는 눈도 실력이다. 뒤쪽 해설에서 말하길 ‘상상의 지리부도’라 했는데,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서도 똑같은 꽃을 찍고 걱정하는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 정도도 좋다.
1914_김행숙
어쩐지 미국 만화, 현대미술관 같다. 에세이는 앞의 시가 녹아든 내용이라 시의 뒤쪽에 배치했나?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_김행숙
'이별의 능력'에 비해 새로운 시도가 많이 느껴진다. 카프카와 변신에 관한 시들이 여러 편 나온다. 스릴러 추리소설 분위기의 시가 많아, 여름의 공포 영화는 차마 무서운 나 같은 사람에게 딱이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_이병률
도착한 책을 다이어리 사이에 껴뒀다가 하루가 끝나자마자 폈다. 앞의 몇 장을 읽고 다시 덮었다. 뭉근하게 들끓는 이 기분은 언제나 낯설다. 이병률의 산문집이 별로였던 걸 보고 내가 변한 건지 글이 변한 건지 어찌할 수 없는 아쉬움 속에 헤매던 게 무색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저 읽을 테다. 오늘은 비가 오니까 괜찮을 거야...
bgm으로는 윤상의 왈츠.
덧) 서효인의 발문은 책 전체가 녹아있는 새로운 글이다. 분석으로 조각조각난 시가 덧붙여져 있어 어색한 꼬리 같았던 것들과 달라서 좋다.
뿌리에게_나희덕
엄마가 대학생 때부터 모은 걸 그 나이를 넘은 지금 본다. 요즘의 시보다 과장된 단어도 많고 시적 허용도 너그럽다. 훨씬 거룩하고 연극적이다. 오히려 지금이 담백한 분위기에 가벼운 언어유희가 많은 듯하다.
시에 목말라있지 않았던 시대는 없다. 그 흐름 속에 선생님으로, 일하는 여성으로, 26살의 시인이 남긴 일기에 가까운 시들. 병실에의 감정이 담긴 산문, '저 불빛들을 기억해' 속의 나희덕에게 이 시집을 다시 읽으라 전해주고 싶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글을 쓴다 해도, 여기 남은 글씨에 더 깊은 마음이 담겼을 테다. 어쩌면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모스부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남길 수 있는 건 뭐지. 내년 가을에 다시 꺼내봐야겠다.
덧) 91년도 주의. 발문의 처녀시집, 여성적, 모성적 본능, 여자 교사와 같은 단어가 거슬린다.
홀로 서기_서정윤
bgm 이소라의 처음 느낌 그대로
엄마와 이모가 산 책, 두 권이 있다. 노란 종이 속 밑줄과 바랜 냄새에 안정감을 느낀다. 사진관에서 쓰던 인화지가 책 사이에 꽂혀있었는데, 그게 시다.
당시에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을만하다. 긍정적이고 편한 단어들은 다시, 지금도 필요하다.
'그다음 1' 시에서 바다를 꿈으로 바꿔 읽으면 라라 랜드가 생각난다. 하늘이랑 바다가 참 많이 나온다.
문득) 꽃 하늘 바다 눈이 나오지 않는 시집이 있을까.
그 여름의 끝_이성복
여름의 끝이라 골랐다. 조심스럽게 절절하다. 사려 깊은 구성이 첫 번째 노래부터 꼼짝없이 따라가야 했던, 앨범이 소비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공들여 배치한 앨범을 차례대로 듣는 것처럼 산, 숲, 나무, 강, 물로 이어진다. 목차만 봐도, '그 여름의 끝'으로 시집이 끝이 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름의 끝에는 이 책을 보자.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_안희연
알라딘의 알고리즘이 이끌었다. 시를 쓰는 사람이면 온 몸에 뻗어있는 안테나가 기본이겠지만, 특별히 섬세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세상을 살아내는 사람의 시선을 봤다. 영상처럼 따라갈 수 있다. 읽던 페이지를 내리고, 연필을 쥐고, 밑줄을 치는 건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라 인색해지는데. 오랜만에 밑줄이 가득하다.
할아버지와 잃어버린 길이 많이 등장한다. 아빠가 길 잃는 꿈을 그렇게 많이 꾸는데.
'늙은 개'를 낡아버린 희망이나 끝난 사랑으로 대신해보듯. 책에 나오는 모든 개를 희망이나 사랑에 비유하면 절절해진다.
3쇄까지 온 데는 제목과 표지 그림의 합이 한몫했다. 이랬네 저랬네 말했지만 좋아요, 사서 보세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명작. 다른 말은 필요가 없다. 네 번째 봤지만 흘러가는 장면보다 숨을 멈추는 구간이 더 많다.
마녀
클리셰의 변주만으로도 짜릿하다. 유치하지만 매 회 챙겨보게 되는 웹툰 같다. 이게 15세가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