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도초도에서 섬초(시금치 중의 시금치) 농사를 지으신다. 그래서 해마다 이쯤이면 나는 어머니 일손을 도우러 간다. 퇴직 후 3년째 일머리도 없고 서투르지만, 일 도우려는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다.
어머니와 함께 시금치를 다듬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가운데 나의 가슴에 확 꽂힌 어머니의 얘기, 이렇게 나를 키우셨음을 알았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은 학교 정문 앞에서 문방구를 했다. 그래서 매주 일요일이면 어머니는 가게 물건을 하러 목포에 가셨다.
한 번은 여객선에서 술·담배 파는 아이를 봤다고 한다.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술을 주라고 하더니 마신 후, 술값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가 술값을 달라며 실랑이하자, 어른은 아이의 허리를 잡아 바다에 떨어뜨릴 듯한 자세를 취하며 오히려 협박했다고 한다.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왕방울 눈물 흘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께서는 너무너무 가슴 아팠고 충격받았다고 하셨다.
또, 다른 아이의 이야기이다.
이 아이는 거리에서 아이스께끼를 팔았는데, 어느 청년이 아이스께끼를 먹고 값을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가 돈 달라며 청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청년은 손을 내 휘두르며 종종걸음으로 자기 갈 길을 갔다고 했다. 아이는 눈물 흘리며 청년을 뒤따라가다 그만 뒤돌아섰는데, 어머니께서는 이 아이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저미셨다고 했다.
배에서,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눈에 밟히는 자식들을 그려보았던 어머니!
'내 자식들도 가르치지 않고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저런 아이처럼 되고 말 텐데.내 기필코 어떻게든지 자식들을 꼭 제대로 교육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는 7남매를 두셨다.
1960, 70년대 격동의 시절에 7남매를 고등학교 이상 졸업시켰다. 어머니 덕분에 우리 7남매는 교육을 받아 자수성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