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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들 Oct 14. 2024

덜컹덜컹 버스에 몸을 싣고

초임교사의 황당함

이 글은 1982년 3월에 겪었던 여자 친구의 황당한 초임교사의 변(辯)이다.



선배님들의 발령이 적체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발령 상황이 호전되어 거의 해소가 될 즈음, 나는 성적이 좋아서 3월 1일 자 발령을 받았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어서 남자 친구 근무 지역인 장흥군으로 희망을 했다.


잔뜩 꿈에 부풀어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 얼마쯤 갔나? 중간에 한 번 내리라고 했다. 알고 보니 장흥군 소재지, 장흥읍이었는데, 거기에서 버스가 한번 정차하였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조금 더 갔다. 또 버스가 정차하더니, 다시 내리라고 했다. 이번에는 관산읍이었는데, 거기에서 다시 완행버스를 타야 했다.


그때부터 슬슬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장흥읍에서, 관산읍에서 또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마을 작은 초등학교가 있는 삼산면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눈물이 펑펑 났다. 비포장도로라서 버스는 하얀 먼지를 잔뜩 내뿜었고, 덜컹거리기에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손잡이를 꽉 잡아야만 했었다. 행복한 일상을 떠나 희망을 품고 간 초임지 학교 가는 길은 아주 슬펐던 것 같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학교가 보이는 곳에 걸어갔으니. 


교문을 들어서니 화단이 잘 정비되어 있는 아담한 시골 학교였다. 교무부장님이 교장실로 안내해 주었는데, 교장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줄줄 연신 닦아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여기 괜찮은 곳이니 울지 마라"라고 하셨다. 말씀을 듣자마자, 막무가내로 눈물이 더 나오며 멈추지 않았다. 지금 되돌아보니, 가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낯선 곳이었기에 더욱 그랬지 않나 싶다. 버스 뒤 꽁무니로 따라오는 흙먼지들이 나를 더욱더 슬프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동네에 새로 지은 한 집을 얻었다.


교사들 가운데 그곳에 본인의 친가가 있어서 가정을 꾸민 교사들이 두 분 정도 계셨고, 나머진 교사들은 객지에서 발령을 받아서 근무하고 계셨다. 거의 모두 선배였고, 내가 가장 어린 후배로 배치받은 것 같았다. 학교에 계신 거의 모든 분들은 선배님이어서 선배님의 말씀이라면 기죽은 듯이 있어야 했다.



학교에 근무한 지 얼마가 되었을까?


아마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 일직 근무자로 내가 근무조가 편성되었던 것 같다. 교무실 칠판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조차도 관심이 없었고 몰랐다. 다들 아는 것이라 여기고 자세히 설명을 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일요일에 내가 일직으로 지명되었었는데, 토요일에 아무 생각도 없이 신나서 광주 집으로 갔었다. 일요일 오후 다시 근무지를 향해 마을로 돌아왔는데, 난리가 났었나 보다. 학교에 일직 근무자가 없었던 것이 소문으로 돌았다.


월요일에 출근했는데 교무실에서 웅성웅성거렸다. 교무부장님이 오시더니, 어제 일요일에 정 선생님이 일직 근무자였는데 근무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일직, 그런 게 뭐예요? 일요일이어서 집에 다녀왔어요."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심상찮은 분위기 속에서 뭔가 크게 잘못했음을 감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찔하다. 동학년 선배 선생님께서 "일요일마다 순번대로 근무자를 지명하면 학교에 나와서 일직 근무를 해야 하고, 당직 배정은 교무실 칠판 귀퉁이에 적혀있다"라고 말씀해 주었다. 내가 잘못 알고 일직 근무를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41년 지난 지금도 생각해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조직사회를 모를 때에는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주변 교사들이 많이 웃었으리라 생각하니, 나 자신도 너무 웃음이 난다. 웃음보다도 황당함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 일이 있는 후에는 칠판에 기재된 내용을 잘 보고 다녔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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