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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들 Nov 02. 2022

손톱 훈장 2

셋째 동생 이야기

벌써 1년이 지났다.



작년 9월 28일, 졸지에 셋째 동생이 그만 세상을 떠났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하염없이 왕방울 눈물 뚝뚝 흘렸다. 너무 황당해서 울고, 아깝고 억울해서 울었다. 이제 돈 벌어보려고 시금치 농사 지을 준비를 차곡차곡했는데, 그리고 가슴 부푼 소망을 품었는데... 동생은 그만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내 고향 '도초도'는 섬 시금치(일명 '섬초', 이하 섬초)로 유명하다. 섬초는 해마다 9,10월경에 씨앗을 뿌려  10월 중하순부터 익년 2월까지 수확한다. 섬초 씨앗을 일찍 파종해서 일찍 출하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에 농민들의 손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내 동생도 그랬다.


뒤늦게 위탁받은 밭에 섬초 씨앗을 서둘러 뿌리려고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예초기를 메고 제초작업을 했다. 코로나19 예방접종 후라서 무리하면 안 되는 데, 동생은 쉴 경황이 없었다. 더군다나 피곤함을 이겨내려고 술도 마셨다. 밤늦도록 일하고 언제 잠을 청했을까? 아무도 모른다. 동생의 숙소는 컨테이너(container)이다. 집에서 어머니와 지내면 취침 시간, 기상 시간이 달라 어머니께 부담드리지 않으려고 컨테이너에서 생활했다.

                                                                       


다음날, '너무 피곤해서 쉬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는 연락 안 했다. 평소 그런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에도 연락이 없어서 어머니는 컨테이너에 가보았다. 그곳에는 동생의 싸늘한 시신이 있었다. 이를 어쩌나? 어머니는 무거운 죄책감으로 땅을 치며 한없이, 한없이 우셨다. '당신 때문이라며, 너무 미안하다'며 꺼이꺼이 우셨다. 그렇게 내 동생은 저 세상으로 갔다.


동생의 장례를 치르며 나도 한없이 울었다. 도대체 믿기질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동네 사람들도 너무너무 안타까워했다. '조석으로 연로하신 어르신 집에 드나들며 안부를 살피고, 크고 작은 일을 꼼꼼히 챙겨 주어 이장(里長)으로 내정해 두었는데, 너무 아깝다'라고 하셨다.


우리 밭의 시금치는 잘 자랐다.

틀림없이 동생이 하늘나라에서 시금치가 잘 자라도록 돌봐 주었을 것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작년 12월, 어머니 혼자서 시금치를 수확할 수 없어서 여동생과 내가 나섰다. 42년 동안 교직 생활만 했지, 농사일을 해보질 않았기에 몹시 힘들었다. 하지만 동생의 마음 헤아리며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했다. '내 평생 그렇게 열심히 일한 적이 있었던가?' 동생을 생각하며 더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작년 겨울, 내 손톱 끝에는 검은색 줄무늬가 생겼다. 나는 '손톱 훈장'이라고 우기며, 사랑하는 셋째 동생 손톱이라고 여겼다.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 동생에게는 발톱 훈장까지 생겼을 것이다. 비록 손톱 훈장을 얻었지만, 지금도 동생을 생각하니 마음 아프다. 아직도 나는 동생과 헤어질 준비를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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