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열리고 한국의 경제가 도약하던 시절 회사에 입사하여, 약 15년간 동고동락을 하였던 당시의 주인공인 OB들과 함께 2박 3일 일정으로 짧은 도쿄 여행을 다녀왔다.
그 당시 한국에 파견되어 회사를 설립하고 사원을 뽑아 조직의 토대를 만들어 준 일본인 상사들이 있었다. 사장과 부서장들이었는데, 한국 직원들과 함께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그들도 이제는 어언 60대 후반부터 7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렀고, 그중에 공장장을 역임하였던 두 명은 이미 타계하였을 만큼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있을 때 하루라도 빨리 만나 회포를 풀고자 이번 여행을 기획하였다. 정치와 역사적으로는 여러 난맥으로 얽혀 있어서 감정과 한이 서려 있는 한일(韓日) 관계이긴 하지만, 경제적인 입장에서는 우리가 일본을 배제한 채 살아갈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마주하곤 한다.
또한 기초과학 분야에서 앞서 나간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회사에 입사하여 그들의 우수한 DNA를 찾아내어 한국 상황에 걸맞게 적용시키느라 분투노력하였던 우리도 다들 60줄에 들어섰다.
1월부터 OB 단톡방에서 이번 여행에 참가할 멤버를 모집하고, 참가자들만 따로 여행방을 만들어 일정을 의논하면서 일찌감치 항공권과 호텔도 예약하였다.
여러 사전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어떤 선물을 가져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도 많았다. OB 중에 바이오 기업을 설립하여 대표로 있는 선배께서 자사 개발품인 친환경 제품을 선뜻 선물로 주시겠다고 하여 그것을 기본으로 삼고, 한국 최고의 완도 산 곱창김을 광주의 후배가 선물로 가져왔으며, 수도권 후배는 일본에서 인기 있는 허니버터 아몬드까지 추가하였다.
4월 26일 아침 일찍 6시 반에 김포공항 출국장에 집합하기로 하였으나 어인 일인지 한 명이 나타나질 않아 발을 동동 구르게 하였다. 김포공항은 아침 일찍부터 출국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으니 인솔자의 마음은 타 들어만 갔다.
항공사에서 나를 찾는 연락이 와서 가보니, 짐으로 부친 친환경 선물에 백색 가루가 들어 있다며 스캐닝에 통과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검색반의 부름을 받고 안으로 소환되어 일일이 선물 내용을 확인해 주었는데 모든 캐리어마다 선배의 친환경 제품 선물(백색 분말)이 들어 있었기에 매번 해명을 해야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늦게서야 나타난 후배의 짐은 여러 번의 설명 덕분에 문제없이 통과하여 시간에 쫓기던 우리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1시간 늦게 나타난 문제의 후배 때문에 아침 식사를 할 수 없어서, 내가 라운지에 들어가 물과 우유를 갖고 나와 간신히 요기를 하였다.
비행기를 타고 창공을 보니 하늘은 맑았고 구름 위로 비행하는 창가에서 현해탄에 떠있는 요트를 발견하여 사진도 찍었다. 하네다공항에 도착하니 인파가 몰려서 입국심사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요즘은 비행기 안에서 입국심사 서류를 주지 않기에 Visit Japan Web으로 미리 정보를 입력하여 갔음에도 공항에서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아서 무용지물이었다. 부득이 종이 서류를 작성하여 입국심사를 마치고 다시 세관신고서를 작성하여 심사대를 통과하니 1시간이나 걸렸다.
네 명의 OB들은 짐이 많았기에 택시 한 대로 호텔까지 이동하였다. 호텔에 도착하니 그 옛날 마케팅을 전수해 줬던 일본인 상사와, 하루 먼저 도쿄에 입경한 선배가 로비에서 대기하다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직 체크인을 할 수 없는 시간이어서 짐을 맡기고 호텔 옆 식당으로 향하여 우동과 소바로 가볍게 점심을 먹었다.
숙박 호텔은 사업차 일본에 자주 다니는 선배의 추천을받아 정한 시나가와(品川) 오이 마치(大井町) 역 앞에 위치하고 있는 Ours Inn Hankyu였다. 이 호텔은 전철역에서 1분 거리에 있었는데 싱글룸과 트윈룸 타워로 나눠져 있고, 대욕장 사우나도 갖추고 있었다. 역에서의 접근성도 용이하며 호텔 가까이에 많은 상가도 입점해 있어서 쇼핑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유니클로와 무인양품(無印良品)이 오이마치역 안에 있었으며 호텔 내에도 잡화점과 대형 식품점이 자리하고 있어서 여러 물건들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오이마치역으로 이동하여 JR(일본 철도) 1일권을 구입하고 간다(神田) 역으로 향했다. 간다에는 간다외어학원(神田外語學院)이 있는데 우리가 처음에 일본에 와서 6개월간 어학연수를 받았던 추억의 랭귀지스쿨이었다. 1987년에 설립된 이 어학원은 선배의 연수 시절부터 쭉 우리들에게 일본어를 깨우쳐준 은혜로운 장소였다. 친절한 교사들, 세계 각국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던 배움터였고, 스피치 콘테스트에 나가서 우승도 하는 등 많은 추억거리를 선사한 곳이어서 감개무량하였다.
어학원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추억을 소환하다가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예전의 본사 빌딩으로 발을 옮겼다. 항상 일본인 상사들을 만날 때마다 집합장소였던 옛 건물은 그대로인데 빨간 대형 간판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본사가 시나가와역으로 이동하여서 그런가 보다. 아직도 그룹사의 자회사가 들어있고 지주회사의 회장인 4대 오너가 근무하고 있는 곳이어서 의미가 컸다.
건물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때마침 대형 렉서스에서 내린 4대 오너와 조우하게 되어 반갑게 인사하고 그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큰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감히 일반 사원들이 쉽게 만날 수 없는 전 세계를 지휘하는 그룹사의 총수인 4대 오너도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머리카락도 듬성듬성해졌지만, 선배는 그가 신입사원이던 시절부터 연수 동기로 함께 지냈던 추억이 있었기에 가장 반가워했다.
간다에서 아키하바라(秋葉原)로 이동했다. 1980~1990년대 일본의 전자산업이 세계를 주도하였을 당시 워크맨이나 카메라 등을 사러 들락거렸던 전자상가가 이제는 많이 변모한 모습이었다. 요즘에는 한국의 전자산업이 일본을 앞서고 있는 분야가 많을 정도여서 아키하바라의 명성은 예전만 못하였으나, 선물이나 부탁을 받은 전자제품을 사러 흥정하던 낭만이 서려 있는 곳이었다. 당시에는 즉석에서 종업원과 밀땅도 하였고, 전자계산기 화면으로 최저 와리비키(할인) 가격을 제시해 오면 고개를 저으며 버티기도 해 가며 싸게 구입하였던 추억도 있었다.
아키하바라를 거쳐 우에노(上野)공원으로 향했는데, 예전에는 노숙자들이 많이 보였지만 이제는 깨끗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일본을 현대화하고 서구화하여 유럽이나 미국과 유사한 공공 공간을 통합하려는 메이지 정부 노력의 일환으로 1873년에 조성된 일본 최초의 공공 공원 중 하나이다. 도쿄국립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 일본 최초의 동물원인 우에노 동물원이 모두 공원 내에 조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는 도쿠가와막부와 관련이 있는 전쟁터였고,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로 정한론을 펼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가 개와 함께 서있는 동상을 보며 사진도 찍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19세기 후반에 학교와 경찰, 은행을 세우는데 앞장선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한 인물이다. 시간에 쫓겨 왕인박사의 기념비도 보지 못하였다.
우에노역 근처에 있는 재래시장으로 향하였는데 아메요코(アメ橫) 상점가는 남대문 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전 세계의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여기도 엔저 특수를 누리고 있었는데 신선한 해산물이 인상적이었다.
시장을 본 다음 오카치마치(御徒町)를 거쳐 아사쿠사(淺草)에 가보자는 의견에 동의하여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였다. 아사쿠사는 상업적인 사찰의 진수를 보여줬는데, 한국의 조용한 절과 정반대로 요란한 곳이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다양한 가게들에서 기념품이나 먹거리를 판매하고 있었다.
일본의 절에는 오미쿠지(おみくじ: 그날의 운세를 재미로 적어 놓은 100엔의 제비 뽑기)가 있는데, 마당 좌우에 나무 서랍이 가득한 매대 같은 게 있고, 그 앞에 금속 통이 하나씩 놓여 있다. 100엔을 매대의 구멍에 넣고, 통을 흔들어서 대나무 막대를 하나 꺼내면 번호가 한자로 쓰여있고 그 번호에 해당하는 서랍을 열면 그날의 운세가 나온다. 만약 악운이 뽑혔을 경우, 매대 근처의 정해진 위치에 운세 종이를 묶어 두고 가면 된다.
마당 좌우 작은 건물은 부적가게인데, 교통, 건강, 수험, 사업 등 원하는 효과에 따라 부적을 판매한다. 가격은 500엔에서 1천 엔 정도인데 이 부적들은 절마다 조금씩 모양이 다르며 귀국할 적에 적당히 생색내는 선물로도 인기가 있다.
본당 건물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동전을 던지고 박수를 두 번 친 다음 소원을 비는 곳이 있다. 5엔짜리 동전을 던지며 참배를 하고(5엔의 발음이 좋은 인연이라는 ご緣의 발음과 같아서 생긴 풍습) 소원을 비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서양 사람들도 따라 하며 동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거대한 불상 같은 건 없다.
아사쿠사는 관광지이자 랜드마크로 유명하며 서민 동네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센소지(淺草寺)라는 절의 정문에 걸린 크고 아름다운 붉은 등이 트레이드 마크인데, 과거에는 조선 통신사와 인연이 있던 절이며, 통신사 인원들이 에도(도쿄)에 도착하면 이곳에서 숙박하였다고 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기모노나 유카타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인력거를 타고 일주하는 커플들도 눈에 띄었다. 관광객의 대다수가 외국인이었는데, 중국인과 한국인도 많았다.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에는 도쿄의 부도심 중 하나로 각종 유흥 시설이 들어선 번화가이기도 했다는데 현재는 관광지로서의 역할만 부각되어 있다. 아사쿠사의 상징 가미나리몬(雷門)은 이 절의 정문이며 도쿄와 일본을 상징하는 명소이다.
도쿄에서 쉽게 갈 수 있는 사찰이란 점과, 절 앞 상점가의 요란하고 시끄러운 분위기로 가장 일본스러운 곳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절들은 여러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곳곳에 스님들이 돌아다니는데 비해, 아사쿠사는 거대한 종교 테마파크처럼 상업화되어 있고 스님을 볼 수가 없었다. 사찰이 상업적으로 이렇게까지 이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긴자(銀座)로 향하였다.
긴자는 도쿄의 대표적인 번화가이며, 세계적인 명품매장이 밀집된 지역이자 일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이다. 긴자 거리 중에서 가장 비싼 곳은 평당 15억 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참고로 서울의 명동에서 가장 비싼 곳은 평당 6억 원 정도이다. 원래 긴자는 도쿄만의 일부였는데, 에도 시대 때 이곳을 흙으로 매립해서 은화 제조소가 생겨났고 '은화를 만드는 거리'라는 뜻에서 긴자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곳에 돈이 몰려들어 대형 유흥가가 조성되었고 20세기 초에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버블경제 전까지 일본에서 날고 긴다는 고급 요정이나 클럽들은 모두 긴자에 있었다. 가부키 극장이나 연예기획사, 백화점 등 각종 문화산업도 자리하게 되어 인지도가 상승하였고, 명실상부 일본 최대의 상권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명품매장이 많아서 일본과 세계의 부자들이 주로 방문하는 만큼 고급 음식점도 많은 지역으로 한 끼 코스요리에 5만 엔을 요구하는 곳도 많다고 한다. 초밥의 장인들에게는 꿈의 지역으로 본점 기반 자체를 긴자로 옮긴다고도 한다.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서서히 켜질 무렵, 긴자에서 가성비 좋기로 유명하다는 우마이스시칸(うまい鮨勘) 본점에 가서 미리 예약한 히노키 코스 요리로 초밥을 즐겼다. 9가지의 코스요리에 생맥주, 뜨겁게 덥힌 사케와 차디찬 레이슈(冷酒)를 마시며 일본 음식의 진수를 느껴 보았다. 하지만 초밥으로는 배가 차지 않고 도쿄의 밤도 즐겨보자는 권유로 이어진 2차, 3차 교류회에서 본격적인 음주와 안주를 즐기다 우동으로 마무리했다.
그렇게 도쿄의 첫날밤은 성대히 저물어갔다.
4월 27일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도쿄에 수없이 다니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일왕이 살고 있다는 황거(皇居)를 가 보기로 하였다. 오이마치역에서 전철로 도쿄역까지 갔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도쿄역은 서울역 모습과 비슷한 조형물인데 하루 열차의 발착 횟수가 3000회라는 일본을 대표하는 역이다.
이 역에 외국의 귀빈이 내리면 마차로 손님을 모셔가기도 한단다.
‘황거’는 도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 중 하나인데 하루에 두 번(9시 반과 1시) 300명씩 입장을 제한한다. 우리는 아침 일찍 황거 앞의 스타벅스에서 서양인들과 섞여서 아침을 때우고 황거 앞 기쿄몬(桔梗門)에 줄을 서서 70번대 번호를 부여받았다. 300명으로 입장인원을 마감하자마자 각자 신원증명 서류를 작성하여 여권을 지참하고 줄을 서서 들어갔다. 입구에서는 모든 사람을 앉혀 놓고 내부에 관련된 안내를 일어와 영어로 소개하였다.
안내 책자에는 한국어도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되었지만 여러 언어로 나뉜 안내 가이드에서 한국어 가이드는 빠져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일어 가이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 가이드가 왜 없는지는 의문이었다. 혹시라도 일본 왕실을 소개할 때 역사나 감정적인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소동을 일으킬만한 원천적인 불씨를 봉쇄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닐까? 내 나름의 뇌피셜이 발동되었다. 음성 가이드 앱을 사전에 스마트폰에 다운로드하여 두면 한국어를 들으면서 황거의 역사와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가 있다.
옛날 이 자리에는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에도성이 있었는데 약 600년 전의 역사적 건축물이나 일왕이 사용하고 있는 시설, 그리고 잘 보존된 커다랗고 아름다운 나무들과 자연 등, 평상시에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장소를 볼 수 있어서 기분이 달랐다. 궁내청 청사와 궁전, 성루, 조용하고 나무가 많은 거리를 지나갔는데, 도쿄의 중심부가 쥐 죽은 듯 조용해서 너무나 놀라웠다.
황거 내부는 고즈넉한 분위기였지만 아직도 천황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정치와는 별개로 일본 국민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일왕이라는 존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 무려 34만 평이라고 하는 그 넓은 장소를 가지고 있고, 부동산 가치가 수조 원이 넘는 곳에서 많은 국빈들을 영접하며 일본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황실의 모습이 정치와는 별개로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또 다른 안식처임을 느끼게 하였다. 영국 윈저궁의 왕실과 묘하게 대비되었다.
견학 코스는 1시간 남짓이었는데 에도성의 발자취를 더듬어 21세기의 황실로 이어지기까지의 역사를 건물 바깥에서만 구경하는 수박 겉핥기식 참관이어서 깊은 내부 경관을 볼 수가 없다. 황거의 내밀한 속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 유감이었다.
황거를 견학하느라 배가 고파진 우리는 바로 맞은 편의 신마루노이치(新丸の一) 빌딩에 자리하고 있는 한식당으로 향하였다. 5층에 자리 잡고 있는 ‘수라간’에서 비빔밥과 찌개를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하였다. 점심을 먹은 후 바로 긴자까지 걸어갔는데 토요일이어서 차량이 없는 거리로 막아 놓아 많은 사람들이 차도를 걸어 다니며 휴일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일본은 4월 27일부터 골든위크 연휴가 시작되었기에 많은 가족들과 친구들, 관광객들이 긴자에 몰려들었다. 긴자 1초메(丁目)에서 8초메까지 천천히 걸어가면서 예쁘게 치장한 현대적인 도쿄를 만끽하였다. 어젯밤에는 야경을 즐겼다면, 오늘은 대낮에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곳을 마음껏 밟아주었다. 휴일의 길거리는 국제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하였다.
긴자를 지나자마자 잡화점 '돈키호테'가 눈에 띄었기에 쇼핑을 하러 들어가 보았다. 별로 살 것이 없었기에 휴식을 취하면서 맞은편에 있는 완구 박물관을 혼자서 가보았다. 수없이 많은 캐릭터와 피규어, 전자 게임기로 꽉 차 있었다. 어린이날을 앞둔 부모들이 해맑은 미소를 띠는 애들에게 완구를 사주는 모습을 보며, ‘어느 나라나 어린이들은 귀엽고 예쁘며 부모들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구나! 나도 빨리 할배가 되고프다’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어제도 2만 2천 보를 넘게 걸었고 오늘도 벌써 2만 보 가까이 걸은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와 자유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나는 상가를 둘러본 후에 호텔 온천욕장에 들어갔다. 투숙객은 500엔이면 입장이 가능했는데 간단히 수건만 들고 들어가서 몸과 마음을 녹이며 일본의 온천욕을 마음껏 즐겼다.
어느덧 6시가 되어갔는데, 오늘 저녁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식사자리였다.
우리 OB들은 왕년에 한국에서 회사를 일으켜 세웠던 일본인 상사들과 극적으로 상봉하였다. 오이마치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다케조(竹蔵)라는 이자카야에서 만났는데, 9명의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만나서 부둥켜안고 반가워하며, 과거를 회상하면서 안부를 묻고 연신 건배를 반복하였다. 특정인의 이름을 세 번씩 불러주느라 선거유세장만 한 열기로 가득 찼다.
그 옛날 우리들에게 실적 달성을 요구하면서 식당에서 쓰는 종이에 목표 숫자를 쓰게 하고 된장을 묻혀 도장을 찍게 하고 약속을 받아내곤 했던 일본 사장의 모습을 추억거리로 삼아 웃음꽃을 피웠다. 과거의 즐거운 회상을 더듬어가다, 이번에는 우리가 일본에 방문하였으니 올 연말 OB들 송년회에는 상사들이 한국에 방문하기를 요청하였다. 사장이 대표로 식당의 티슈 위에 '올 연말에 반드시 한국에 가겠습니다(本年必ず韓國に行きます)'라는 서약서를 쓰고 간장으로 지문을 찍게 하여 보관하였다. 한국에서는 된장, 일본에서는 간장이었던 셈이다.
그들과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서 3시간의 1차를 마감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시 근처로 옮겨서 2차를 하였는데 1차는 일본 측에서, 2차는 우리들이 부담하였다. 2차 자리도 이자카야였는데 생맥주를 마셔가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어가 완전치 않았던 직원들을 통역해 주느라 혀와 손이 바빴지만 정담에 흠뻑 젖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어느덧 늦은 밤 시간이 되어 아쉬움을 뒤로한 채 올 연말의 재회를 약속하고 오이마치역에서 작별을 고하였다.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던 멤버들은 3차로 우동이나 라면을 먹겠다며 식당을 찾아내고 밤늦게까지 맥주와 안주로 속을 채웠다.
다음 날 아침은 호텔에서 식사했는데, 상당히 합리적인 800엔 가격에 뷔페 또는 일식조찬을 먹을 수가 있었다. 우리 돈으로 7,000원 정도에 불과한 돈으로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랐다. 한국에서 연일 비등하는 물가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우리는 호텔 앞 정류장에서 공항 리무진버스를 타고 하네다 국제공항으로 향하였다.
면세품 선물로 일행들에게 닛카의 싱글몰트 위스키 요이치(余市)와, 총리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사케 닷사이(獺祭)를 추천해 주었다. 면세 코너의 유니클로에서는 속옷 등 의류를 추천해 주었다.
모처럼 맘이 맞고 흥에 겨운 일행들과 함께 찾아간 도쿄의 2박 3일 일정은 체재 시간이 48시간에 불과하였지만, 많은 이야깃거리와 풍성한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 옛날, 회사를 일으켜 세우느라 앞장서서 동분서주하던 30대 상사들이 이제는 70대의 노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우리도 언젠가 늙어가겠지만, 건강하게 나이를 먹으며 더욱 숙성해지자는 다짐을 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