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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Jul 14. 2024

무모한 산행, 진한 우정

양주 천보산 등산의 추억

중학교 동창들 등산 모임이 있던 날, 새벽에 잠을 설치고 꿈자리까지 사납다.

하필 내가 싫어하는 13일에 토요일이라니...

'오늘의 운세'에서도 몸조심하고 외출을 삼가란다.


으음... 그래도 오랜만의 친구들 모임인데...

망설이다 촉박하게 짐보따리를 싸느라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나는 전문 산악인도 아니고 산악회 회원도 아니며 집 근처 남한산성이나 트래킹 하는 수준인데...


이번 모임을 주도하는 친구와, 식사 초대를 하겠다는 또 다른 친구가 자꾸 연락해서 권유하는 바람에 일단 즐거운 마음과 가벼운 복장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물론 이것이 큰 오산이었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친구가 카톡으로 보내온 대략적인 일정은 아마튜어도 가볼 만하다고 느낄만했다.


- 7.13(토) 양주 등산 및 식사 계획


1. 개요: 지난 6.8(토) 등산 후 종로에서 합류한 친구랑 저녁식사를 같이 함.

그 친구가 7.13(토) 양주에서 크게 점심식사를 쏘겠다고 제안함.

그래서 양주 천보산으로 결정했음.


2.  행사계획(차량 2대로 이동)

* 09시 30분 왕십리역 1번 출구 집결

* 10시 40분: 양주 천보산 입구 도착

* 10시 40분~12시 : 등산(회암사지 포함)

* 12시~12시 50분 박물관 관람

* 13시~13시 30분 연천으로 이동

- 점심식사: 한탄강 오두막골(연천군 청산면 대전리 552)

* 13:30~15:30 중식

* 15:30 귀가 위한 출발

* 16:30 왕십리 도착 해산


3. 기타

- 회비: 3만 원

- 조식: 각자 해결

- 간식: 산악회 준비(물, 빵, 떡, 초콜릿)


천보산은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423m의 낮은 산이지만 회암사지를 품고 있고 풍경이 멋진 곳이란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엄청나게 넓은 회암사의 사찰터를 지나 일주문에 진입하면 천보산 들머리가 있고, 입구부터 정상까지 1.9km 정도.

정상에 오르면 양주와 포천시가 내려다 보이고, 북한산과 도봉산이 바라 보이는 코스.


양주시에는 천보산(天寶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3개인데, 여기에서 언급하는 천보산은 회암사 뒷산을 말한다. 천보산맥은 양주시 동쪽을 남북 방향으로 내달리면서 포천시와 양주시를 갈라놓고 있다.


고려 충선왕 15년(1328) 지공(指空) 스님이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후,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와 지형이 같아 가람(伽藍: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을 이룩하면 불법이 흥한다는 관점에서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서 우왕 4년(1378), 명승 나옹(懶翁) 선사가 회암사를 중건했다고 한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본산이며, 이성계는 회암사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여 나옹의 제자이자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였고, 불사(佛事)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했다고 전해진다.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檜巖寺址 禪覺王師碑)는 고려시대의 석비인데 보물로 지정되었다.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회암사 부근에는 무학대사비와 무학대사탑도 보존되어 있었다.


등산 코스는 데크 계단을 오르거나 바위가 있으면 밧줄을 잡거나 발판이 있어서 그다지 힘겹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또 다른 견해로는 짧지만 급경사 코스가 계속되고, 대부분 마사토 지대라서 미끄럽단다.

너른 바위가 나오면 숨 좀 고르면서 소담스러운 풍경 한 번 둘러보면 된단다.

그러다 ​다시 나타나는 데크 계단이 힘들면, 쉬면서 풍경을 감상하란다. 꼭 스틱을 지참하는 게 좋단다.


​천보산이 비록 400 고지 산이지만, 오르는 내내 시원한 풍경만큼은 일품이라는 것이 기대감을 갖게 하였다.


양주와 포천시 경계의 산답게, 시원한 두 도시의 뷰가 훤하게 터져서 좋다는 후기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천보산에 오르다죽는 줄만 알았다.

10명이 자연스럽게 흩어져서 등산했는데, 장맛비 토사로 인해 우리 팀 선도(先導)가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앞만 보고 따라가다 가파른 능선으로 접어들었는데 길은 없고 경사가 장난 아니다. 마냥 위만 바라보며 전진하는 태세인데 공병대도 없으니 우리가 길을 만들어야 할 판이다.


마사토로 덮인 계곡은 최근 호우 탓인지 빗물을 잔뜩 머금은 낙엽밭이다. 발은 푹푹 빠지고, 가끔씩 붙잡는 나뭇가지는 썩어서 떨어져 나간다. 체감온도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 과연 험난한 사선을 뚫고 정상에 올라갈 수 있을까?


곳곳에 펼쳐진 나뭇가지에 여기저기 옷이 걸리고 찢기고 찍힌다. 어딘가 생채기가 난 듯 쓰라려온다.


점점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가 쉽지 않아 지더니 호흡곤란에 현기증이 난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은 탓인지 저혈당이 급습한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에 선글라스는 안개가 서린다.


커다란 바위를 눈앞에 두면 옆으로 돌아 넘어야 하는데 다리까지 후들거린다.

장갑도 없는 맨 손으로 마땅히 잡을 곳이 없고, 스틱도 중심을 잃어 허공을 가른다.


어느덧 눈앞이 캄캄해지며 풀썩 주저앉고 싶은데 쉴만한 공간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가벼운 트래킹 정도로 생각해서 신고 나온 샌들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며 발이 좌우로 미끄러진다.


만약 두 다리가 풀렸더라면 이 세상에 없었을 수도 있었을까...


처음에는 4명이 헤매었는데 2명은 앞서갔고 어디선가 어서 오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제대로 된 등산로로 접어들었을까...


갑자기 체중을 못 이긴 스틱 하나가 부러져나간다. 싸구려의 한계일까? 그래도 10년 넘게 썼는데...


샌들 신고 장갑도 없이 산에 오르다니...

신발과 장갑, 스틱의 중요성을 감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등산을 권유한 친구가 장갑 하나를 내어주고 내 짐도 들어줬다. 잠시 쉬면서 물도 마시고 단 것을 먹으니 현기증이 좀 가라앉는다. 용기를 내어 다시 몇 발짝씩 전진해 본다.


가재걸음으로 오르기를 반복하다 발이 미끄러진다. 친구가 스틱의 고무패킹을 빼준다. 한결 잘 찍힌다. 스틱 사용의 기본도 모르고 산에 오르다니...


점차 더 어지럽고 매스껍다. 다리가 휘청거리며 탈수증세까지 심해진다. 숨이 가빠져서 호흡이 어렵다.


벨트와 단추도 풀어보고 모자도 젖혀본다. 모든 게 거추장스럽고 만사 짜증이 다.

내가 이런 생고생을 사서 하는가... 나도 잘 모르겠다. 평범한 동네 마실길만 생각했던 나의 무지(無知)와 준비 미숙을 탓해본다.


공포스러운 것은 퇴로는 없고 무조건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인데 눈앞에 보이는 건 흙과 모래와 암석과 나뭇가지들 뿐이다.

이를 꽉 악물고 젖 먹던 힘을 쥐어짜본다.


년 전인가 오늘의 친구들과 함께 내변산 관음봉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거대한 바위를 오르는데 비가 내려 미끄러워서 밧줄에 의지해서 올랐더니 어깨 근육에 문제가 생기더라니... 소녀어깨인가?


아득해지려는 의식의 끈을 부여잡아본다. 내일이면 필시 몸살이 나있거나 다리에 알이 배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직은 괜찮구나.

어디선가 두런두런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정상이 멀지 않았구나.


한걸음에 급피치를 올려 으랏차차! 전진이다.

아~ 드디어 정상이다.


오르고 보니 멀쩡한 데크 길이 바로 옆에 나있다.

우린 왜 그 길을 못 찾았을까?


전우들이 손뼉 쳐주며 이 시원찮은 낙오병을 반겨준다. 하여간 나는 손이 많이 간다.


부리나케 찬물을 옷 안에 부어주고 물과 단 것을 입에 물려주며 생환을 반겨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정을 찾아본다.

이게 뭔 망신살인가 싶지만 뜨거운 우정에 목이 멘다.


한편에선 걱정해 주는 표정에, 또 한편에선 건강상태를 의심하는 눈초리라니...


아니, 겨우 423m 산을 이렇게 힘겹게 오르는데 20배 높이 에베레스트는 어찌 정복하누?


의식을 회복하고 숨을 고르지만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다.

양주시나 포천시 전경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간신히 미소를 띠고 인증숏을 찍는다.


"친구들과 다시 만나게 해 주셔서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되뇌며 일사천리로 독사진과 단체사진을 박고 하산길로 향한다.


내려가는 길을 보니 이쪽도 가파른 급경사가 이어진다. 그리 수월한 코스는 아니로구나.

거의 산 밑에 다다르자 다시금 현기증이 엄습한다. 친절한 친구들이 계곡물에 세수하고 발을 담그자고 이끈다.


바위에 걸터앉아 샌들을 벗고 명경지수에 몸을 맡긴다.

천보산 약수가 피로를 풀어주네.


내가 늦게 내려간 탓에 박물관도 못 보고 먼저 기다리는 친구들과 합류하여 한탄강으로 향한다.

친구들아 미안타...


'한탄강 오두막골'에서 메기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으며 막걸리를 들이켠다.

걸쭉한 입담에 사람 좋은 친구가 크게 한 턱을 쏜다니 절로 흐뭇해진다.

든든한 같은 성씨의 그 친구가 나를 보고 싶어서 초청했다는 말에 일말의 창피함을 모면한다.

그래, 나는 오늘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했지!


커피를 마시러 가는 길에 38선 비석을 지나다 차를 내려 사진을 찍어본다. 요즘 젊은이들은 38선을 알기나 할까?


38선은 1945년 8월 15일, 미국과 소련의 남북 분할 점령에 의해 설치된 군사분계선이다. 6.25 전쟁에서 이 38선을 사수하기 위해 호국영웅들이 피를 흘렸다.

자유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곳인데... 어느덧 역사에 파묻히고 있다.


2차는 냉커피와 세숫대야만 한 팥빙수로 더위를 달래 가며 오랜만의 환담을 나눈다.

어린 시절 5원짜리 아이스케키를 팔았다는 얘기와, 60대의 골프입문이 옳은 선택인가가 화제였다.


3차는 풀코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르텔 XO 코냑에 참외와 복숭아 안주.

통 큰 친구는 참 꼼꼼하게 3차까지도 준비했구나.

돋보기안경까지 선물로 내놓은 진심이 느껴졌다. 백내장 수술을 받고 렌즈도 삽입했다니, 이제 우리가 그럴 나이로구나.


코냑을 온 더락으로 마시는데, 탁 트인 한탄강을 감싼 울타리의 능소화에, 강물을 가르는 철로 위에 기차까지...

어디서 이런 낭만과 여유를 맛보겠는가?

어떤 친구는 두 잔의 온 더락으로 내 얼굴에 화기가 돌아왔다며 기뻐해줬다.


한탄강에서 수영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 텃밭 가꾸기, 현역 연장법, 연금 수령, 아내지적과 잔소리 받아들이기, 자녀 혼사에 부모님 별세를 화두로 삼다 보니 어느덧 요양병원과 요양원의 차이까지 화제로 떠오른다.


이제 사람같이 살 날이 과연 몇 년이나 남았느냐는 다소 비관적인 얘기에, 그러니까 앞으로 더 자주 보자며 어깨를 부여 앉고 작별인사를 나눈다.


서울로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 무렵.

우리는 냉면에 만두로 간단히 저녁을 마치고 헤어진다.


가볍게 생각하고 떠난 산행길에서 경험한 악몽 같은 등산길...

50년 전 까까머리 중학교 친구들의 변치 않는 진한 우정...


나는 체력과 건강을 지적받으면서도, 다시 태어나게 인도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세상에 쉬운 산은 없다.

산행에 있어서 꼭 높낮이만이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라는 교훈도 얻었다.


다음 만남은 수원화성길로 예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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