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클라베(Conclave)를 보고
고요한 성벽 안, 붉은 가운을 두른 남자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세상을 떠난 교황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들은 단단한 문 뒤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영화 콘클라베는 바티칸에서 진행되는 교황 선출 과정, 그 신비롭고 엄숙한 의식을 조명한다. 전 세계 10억 명이 넘는 신자의 정신적 지도자를 뽑는 자리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히 종교적 행사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 본성의 민낯을 들춰내며, 신앙과 권력, 양심과 야망이 부딪치는 순간들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영화를 보면서 침묵과 선택, 그리고 그 무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침묵’이었다. 시스티나 성당의 엄숙한 분위기, 각자의 속내를 숨긴 채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 그리고 투표용지를 접는 순간의 정적. 그 침묵이야말로 그들이 짊어진 선택의 무게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치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택’은 누군가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것을 고르는 행위지만, 때로는 어떤 선택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한 추기경(랄프 파인즈)의 시선을 따라가며 전개된다. 그는 신념을 품은 채 투표에 임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둘러싼 음모와 정치적 계산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한때 동료였던 이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은밀한 대화 속에서는 신앙보다 권력이 더 큰 무게로 작용한다. “신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적인 이해관계와 타협이 교차하는 순간들은 묘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절제'다. 거대한 성당과 금빛 찬란한 예복, 웅장한 음악 없이도 긴장감은 팽팽하게 유지된다. 오히려 낮은 목소리의 대화, 침묵 속의 응시, 천천히 적어 내려가는 한 표가 더 큰 울림을 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심리 스릴러처럼 펼쳐진다는 것이다.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신앙의 가면을 벗을 수 없는 인물들의 모습은 압도적이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의 뜻을 좇는다고 하지만, 결국 모든 선택은 인간이 내린다. 그 속에는 신성한 이상도 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선택이 올바른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진정 신의 뜻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콘클라베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정답 없는 사색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 삶에서도 크고 작은 ‘콘클라베’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후보를 두고 고민한다.
때로는 이성이, 때로는 감정이, 때로는 주변 환경이 그 선택을 좌우한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우리 몫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종교 영화가 아니다.
권력과 신념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인간이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아무 말 없이도 깊은 파장을 남기는 이 영화처럼, 나 또한 한동안 침묵 속에서 내 안의 신념과 욕망을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선택을 앞둔 인간이 마주하는 두려움과 책임,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시스티나 성당 안에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콘클라베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