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 전주, 임실, 군산, 서천의 기억
짧은 고향 방문
- 1박 2일: 전주, 임실, 군산, 서천의 기억
목요일 아침: 전주로 향하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 목요일 아침, 길을 나섰다. 고속도로 통행료가 무료인 연휴 기간을 굳이 피한 이유는 단순했다. 몇 푼 아끼는 것보다 한적한 도로 위에서 여유롭게 달리는 편안함을 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을 열고 달린 차는 정오 무렵 전주에 닿았다. 아버지를 뵙고 추석 선물과 용돈을 전해드린 뒤, 함께 전주에서 유명한 ‘한국집’으로 향했다.
비빔밥과 갈비탕으로 전국에 이름난 그곳에서 고모와 작은아버지 부부를 만났다.
고모는 여전히 온화한 기운을 풍기며 단정한 미소를 지으셨다. 작은아버지는 꾸준한 운동으로 탄탄한 기색이 얼굴에 묻어 있었다. 작은어머니는 최근 전주 콩쿠르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을 불러 2등을 차지했다며 활짝 웃으셨다. “전국대회에 도전하고 싶다”는 소망은 가족 모두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는 등불 같았다. 식탁 위 음식보다 더 따뜻했던 건 오랜만에 모인 식구들의 정담이었다.
임실 치즈마을: 사촌 여동생과의 재회
점심을 마친 후 우리는 임실 치즈마을로 향했다. 축제를 앞두고 분주한 마을 곳곳에는 치즈 향기가 묻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루체른 카페’를 운영하는 사촌 여동생을 만났다. 스위스에서 공수한 뻐꾸기시계,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우리는 커피와 쿠키를 곁들이며 긴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는 큰 형님의 막내딸과 오랜만에 조우하셔서 감개무량해하셨다. 20세기에서 21세기를 건너온 듯, 친척 간의 이야기들은 세대를 이어 흐르는 강물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따뜻한 흐름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군산: 숲뷰 호텔과 은파호수공원
아버지를 전주에 모셔다 드리고 군산으로 향했다. 숙소로 잡은 '라마다호텔' 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바다가 아니라 숲이었다. 흔히들 오션뷰라 부르지만, 이곳은 ‘포레스트 뷰’라 이름하고 싶을 만큼 고요하면서도 싱그러웠다.
저녁은 ‘삼거리식당’에서 민물새우탕을 맛보았다. 얼큰하면서도 깊은 국물 맛은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 주었다.
이어서 찾은 은파호수공원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고즈넉했다. 호수 위 다리를 따라 번지는 조명, 둘레길에서 만난 길냥이 두 마리와의 눈 맞춤은 나그네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숙소로 돌아와 군산 지역 맥주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비 내리는 숲을 바라보았다.
개천절 아침: 이성당 빵집의 긴 줄
이튿날은 개천절 아침. 군산의 명물, ‘이성당’ 빵집으로 향했다. 해방 직후부터 이어져온 빵집은 어느덧 80주년을 맞았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빵을 사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단팥빵과 야채빵은 물론, 슈크림빵·멜론빵·곰보빵·카레크로켓·생크림 앙금빵까지 인기 품목은 일찍부터 동이 나곤 했다.
전주가 내 고향이지만, 음식과 볼거리는 군산이 오히려 더 풍성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바다를 낀 도시답게 먹거리와 해산물이 풍부하고,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흔적들이 역사를 곱씹게 만든다.
군산 구시가지: 영화와 시간 여행
점심은 구시가지 ‘한일옥’에서 한우뭇국을 맛보았다. 국물은 담백했고, 일본식 적산 가옥에 태극기가 걸린 입구가 시선을 끌었다.
바로 맞은편에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였던 ‘초원사진관’이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
한석규와 심은하의 대사가 아직도 여운처럼 흐르고 있었다.
사진관 앞에 놓인 오토바이와 단속 차량은 영화 속 한 장면을 현실로 꺼내놓은 듯했다.
관세박물관, 근대미술관, 일본식 가옥, 그리고 한국에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사찰 동국사까지 이어지는 군산의 시간여행 코스는, 100여 년 전의 거리를 내 발걸음 속에 되살려냈다. 묘한 향수와 씁쓸함이 함께 번졌다.
충남 서천: 국립생태원에서의 깨달음
군산을 떠나 동백대교를 건너자 10분 만에 충남 서천의 국립생태원에 닿았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 동기였던 주광영 박사가 한때 근무했던 곳이라 더 각별했다.
대표적인 시설물인 에코리움에는 열대·사막·지중해·온대·극지관 등 다섯 기후가 구현되어 있었고, 1600여 종의 동식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눈높이에 맞춘 생태교육장이었다. 전시관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연휴를 맞아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방문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비가 너무 내려 야외에 나가보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습지 생태계, 삼림식생, 동식물 서식공간을 자연의 모습 그대로 봤어야 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내 시선을 붙잡은 건 기획전시관에서 만난 ‘잎꾼개미’였다. 몸집보다 수십 배 큰 잎을 잘라 모아 줄줄이 운반하며, 땅속에서 버섯을 기르는 부지런한 개미들. “영차, 영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게으른 베짱이와 대비되는 그들의 부지런함을 카메라에 가득 담았다. 움직이는 장면 하나하나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귀가: 빗속의 여정
비가 계속 내리자 어느덧 어둑어둑해졌다. 서둘러 빗속을 뚫고 귀갓길에 올랐다. 다행히 상행선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아 두 시간 반 만에 집에 닿을 수 있었다.
맺으며
짧은 1박 2일의 여정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밀도는 길고 긴 연휴 못지않았다. 가족과 친척, 오랜 추억과 새로운 풍경, 음식과 역사가 한데 어우러졌다.
고향 방문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었다. 세대를 잇고, 마음을 돌아보며, 또다시 삶을 이어가는 긴 사랑의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