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켜켜이 쌓인 그 자리 그곳에
동대문을 걸으며
- 추억이 켜켜이 쌓인 그 자리 그곳에
휴일을 맞아 아내와 함께 동대문을 찾았다. 번화한 거리를 걷다 보니,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장면들이 불현듯 살아났다.
1978년 여름방학,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생전 처음 서울에 올라와 동대문 야구장을 찾았다. 봉황대기 고교야구 예선전, 우리 포수가 2루타를 때렸을 때 레프트 외야석에서 환호하던 그 순간. 그날의 흥분과 설렘이 아직도 선명하다.
서울에서의 첫날밤은 청담동 사촌 누나의 집이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던 강남, 버스 몇 대가 오가던 신작로. 그곳에서 교복을 입은 나를 알아본 대학생이 다가와 “혹시 J고 학생이냐” 물으며 반겨주던 장면도 떠오른다. 대학에 다니던 선배였는데, 그 낯선 도시에서의 따뜻한 격려는, 서울에 대한 내 첫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82년, 대학생이었던 나는 다시 동대문 야구장을 찾았다. 전두환 정부의 정책으로 프로야구가 출범한 해, 개막전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서 표를 구했다. 혼자였지만 설렘은 충만했다. 라이트 외야석에서 본 MBC청룡 이종도의 만루홈런, 그 함성과 박수 소리는 내 청춘의 서막 같았다. 나중에 그 티켓을 보관했다가 사진전에 응모해 순금 야구공을 선물로 받았으니, 동대문은 내게 행운의 장소이기도 했다.
1987년 여름, 사회 초년생이 되어 다시 동대문을 찾았다. 이번엔 직장인으로 국립중앙의료원과 이대 동대문병원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을 만나고, 약국을 돌며 약사들에게 경쟁사와 제품 현황을 파악하던 긴장된 순간들. 병원 앞 의정부 부대찌개 집에서 선배가 사주던 점심은 지금도 혀끝에 남아 있다. 그 맛과 냄새는 젊은 날의 땀과 함께 어우러져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그 후로 동대문은 내게 생활의 무대였다. 병원 영업과 마케팅, 평화시장에서 산 허름한 양복과 바지, 막걸리에 빈대떡, 그리고 젊음의 분주함.
어느새 세월은 훌쩍 흘러 21세기가 되었고, 동대문은 옛 야구장이 사라진 자리에 화려한 패션과 문화의 중심지로 변해 있었다.
야구장 외야의 전광판 두 개만이 덩그러니 그 시절을 증언하고 있었다.
이번에 아내와 찾은 국립중앙의료원 앞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부대찌개 집 자리엔 낙지집이 들어서 있었다. 병원 담벼락에는 담쟁이덩굴이 세월의 낙서처럼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산 낙지볶음과 두루치기를 함께 먹으며 옛 추억을 회상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능소화는, 마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어떤 기억의 상징처럼 보였다.
오늘의 동대문은 외국인들로 가득하고, 패션과 쇼핑, 문화유산이 어우러진 도시의 명소다. 하지만 내게 동대문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청춘의 환호성과, 사회 초년병의 긴장, 그리고 아내와 나누는 소소한 오늘까지...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나만의 추억의 지층이다.
오랜만에 아내의 손을 잡고 옛 거리를 걸었다. 야구장의 환호성도, 부대찌개의 맛도, 젊은 날의 긴장도 이제는 지나간 기억이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새로운 추억으로 덧칠되고 있었다.
동대문의 밤은 그렇게 다시 우리 부부의 이야기 속에 고요히 스며들어 갔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