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오름, 제주를 품은 정상에서
셋째 날 아침,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제주였다. 창문을 여니 바람이 포근하게 들어왔다.
어제 노꼬메오름에서 한라산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오늘은 군산오름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제는 오름의 리듬이 익숙해져 있었다.
오름은 나를 숨차게 만들지만, 대신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 길은 좁지만, 하늘은 넓다
군산오름으로 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다.
진입로는 좁은 1차선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반사경을 보지 않으면 맞은편 차와 마주칠 뻔한다.
이곳은 운전보다 감각이 필요한 길이다.
길은 불편했지만, 하늘은 그만큼 넓어 보였다.
좁은 주차장에 도착하니 젊은 운전자가 오르막 주차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긴장된 손끝이 나의 초행길을 떠올리게 했다.
여행은 늘 조금의 두려움을 품고 시작된다.
- 단 10분의 오름, 360도의 풍경
군산오름은 짧다.
입구에서 정상까지 10분 남짓.
그러나 그 10분이 제주를 통째로 보여주는 시간이다.
정상에 서면 서귀포의 푸른 바다, 반대편으로는 한라산 능선과 겹겹의 오름들이 펼쳐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가 일렁이고, 하늘은 멀리까지 이어진다.
360도로 펼쳐진 풍경 속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나는 그냥 서 있었다.
오직 바람과 숨소리만이 나를 감쌌다.
- 전쟁의 흔적, 풀숲 속의 시간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면 진지동굴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파놓은 동굴이다. 지금은 풀숲에 덮여 흔적이 희미하지만,
그곳에 서면 바람결이 달라진다. 이 평화로운 땅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숙연하게 다가왔다.
푸른 억새 사이에 묻힌 어두운 동굴은
역사와 현재가 교차하는 작은 상처였다.
- 점심, 전복돌솥밥의 온기
오름을 내려오니 어느새 배가 고팠다.
아내가 추천한 식당으로 향했다.
이름은 '생원전복'.
문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밀려왔다.
전복돌솥밥 위로 개우(전복 내장)와 참기름의 향이 피어오른다.
밑반찬 하나하나 정갈했고, 밥알 사이로 전복살이 쫀득하게 씹혔다.
예전에 갔던 '명진전복'보다 더 담백했다.
단정한 한 끼가 몸과 마음을 모두 채워주었다.
- 산방산과 황우치 해안의 오후
식사 후에는 산방산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웅장한 바위산 아래로 바다가 펼쳐진다.
용머리해안에 도착했지만, 파도가 거세 입장은 불가했다. 대신 근처 하멜 유적지를 둘러보고, 황우치 해안 지질트레일을 걸었다.
눈앞에 산방산이 버티고, 그 맞은편에는 깊고 푸른 바다가 있었다. 바다 빛은 말 그대로 시퍼랬다. 제주에서 가장 짙은 푸름이 아닐까.
그곳이 과거 미군의 훈련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의 황우치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어도, 바람은 언제나 현재형이었다.
-오름과 여행의 완성
숙소로 돌아오는 길, 창밖의 풍경이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하루의 빛이 사라지는 대신 제주의 기억이 내 안에 남았다.
군산오름의 정상에서, 나는 처음으로
‘제주를 다 품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바다와 산, 사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던 순간.
이번 여행에서 깨달았다.
오름은 단지 얕은 산이 아니라, 마음의 높이를 다시 세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