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나무 향기에 취한 산책: 영주산 둘레길
금요일 아침, 친구들은 골프장으로 향했다. 나는 오후에 한국과 일본의 컨설팅 화상회의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오전에는 혼자 영주산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산이었다.
영주산(瀛洲山)은 해발 326m, 높이 176m의 낮은 오름이다.
‘영(瀛)’은 바다를 뜻하고 주(洲)는 물가를 뜻하니 ‘바닷가에 있는 산’이라는 뜻인가? 호기심에 찾아보니 원래는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했다고 한다. 영주산은 봉래산, 방장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로 일컬어지는데, 진시황의 명령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곳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신령스러운 산이다.
예로부터 봉우리에 안개가 끼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라 불릴 만큼 풍경이 고요하고 아름답다.
오르는 길은 억새밭과 울창한 삼나무 숲으로 이어져 있다.
나는 입구 오른편 나무 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랐다.
노꼬메오름이나 다랑쉬오름보다 완만하고, 계단 폭도 낮아 두 칸을 한 걸음에 오를 수 있을 만큼 편안했다. 계단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지만, 그 낡음이 오히려 정겨웠다.
정상에 오르자 동쪽으로 성읍마을, 서쪽으로 푸른 목장, 남쪽으로는 천미천이 흐르고, 멀리 성산일출봉과 풍차들의 행렬이 보였다.
한라산 아래 펼쳐진 제주의 풍경은 그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실수를 했다.
정상을 지나 왼쪽 길로 내려왔는데, 그 길은 급경사 야자수 매트로 이어진 코스였다. 계단 폭이 좁고 간격이 조밀해 무릎에 부담이 갔다. 한 발만 헛디뎌도 아찔할 정도였다.
그제야 나는, 올라올 때 만난 사람이 오른쪽 계단으로 되돌아가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가 현명했을까.
그래도 숲 속의 바람은 부드러웠다. 삼나무 향이 코끝을 스쳤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영주산 둘레길은 전체 약 3.8km,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바람에 이끌리고 향기에 취하는 길.
높지 않지만 깊은 여운이 남는 길이었다.
나는 그 길에서 잠시, ‘산이 주는 침묵과 바다가 준 설렘’을 함께 떠올렸다.
어젯밤 붉은 달 아래의 포구와, 오늘 아침 초록 숲 위의 산책로... 그 둘이 어쩐지 닮아 있었다.
숙소 근처에서 시래깃국으로 요기를 한 후 2시간 동안 비즈니스 미팅을 가졌다. 오늘은 친구 3명이 속속 도착해서 2개 룸의 숙소가 모처럼 활기를 띄었다. 인근 '돌집식당'에서 생흑돼지모둠으로 배를 채우고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자정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