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와 걷는 서울, 첫 페이지

그 비오는 날의 남산

by 라니

서울살이 20년.
하지만 엄마와 서울을 함께 걸어본 기억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늘 바빴다. 엄마도, 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그 빈자리는 우리 셋을 더 가까이 묶어줬다.
그래서 올해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작은 계획을 세웠다.
엄마, 여동생, 그리고 나. 여자들만의 남산데이트.


근로자의 날.
쉬는 날이지만 나는 기꺼이 여행 준비를 맡았다.식당 예약, 대중교통 확인,

걷기 힘든 엄마를 위해 짧은 동선을 고민하며 인터넷을 뒤졌다.
결론은 하나였다. 남산은 팔순 노모와 함께하기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날, 비가 내렸다.
며칠간 맑았던 날씨가 왜 그날만 흐린 건지.
남산타워 한식 레스토랑도 예약하고 선금까지 걸어놨는데,
비 덕분에 취소할까 말까를 수차례 고민하다 결국 떠나기로 했다.

언제 또 엄마와 동생이 서울까지 올 수 있을까.
그 생각 하나로 우산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남산 셔틀버스를 타고, 200미터 남짓한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올랐다.
남산타워가 보이고, 정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옆엔 여전히 인기 있는 ‘사랑의 열쇠’ 담장이 있었다.

젊은 시절엔 나도 한 번쯤 그 열쇠를 걸어봤던 것 같다.
이름을 적고 마음을 잠그던 그 시절.
지금은 사랑의 모양이 조금 다르다.
마음을 자물쇠 대신, 함께 걷는 시간에 건다.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그 시간.

비가 멈추자, 엄마는 파릇한 나뭇잎을 보며 기분이 좋아지셨다.
힘들다던 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딸들과 함께하는 팔순노모의 웃음


갈까 말까 망설였던 시간이 아까울 만큼, 남산데이트는 즐거웠다.

타워 전망대에 오르기 전, ‘인사이드 서울’이라는 전시 공간에 들렀다.
서울의 사계절을 색과 소리로 담은 그곳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빛의 연출로,
서울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전망대로 올라가니 서울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가 갠 직후라 안개가 잠시 머물렀지만, 그 나름대로 운치 있었다.
전망대 한쪽에선 약과, 기념품, 소품들이 줄지어 있었고
카페에서는 맥주도 판매하고 있었다.
서울을 내려다보며 마시는 맥주는 맛있어 보였지만,
저녁 시간이 가까워 우린 그냥 풍경만 즐기기로 했다.


식사 시간.
우리가 예약한 ‘한쿡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산나물 화전으로 시작된 한식 코스요리는 정갈하고 깔끔했다.

엄마는 왜 무거운 자갈 위에 음식을 올려주는지 궁금해하시며
직원에게 말을 건넸고,
나는 괜히 창피해서 "엄마, 그냥 조용히 먹자"며 웃으며 투덜거렸다.
그 순간이 참 따뜻했다.

고급 한식당에서의 경험도,
이날의 풍경과 대화도
엄마와 동생에게 오래 기억될 소중한 추억이 되길 바란다.

엄마와 함께한 남산.
조금 힘들었지만 오래도록 남을 산책.
아마도 내가 다음 여행을 또 준비하게 되는 이유는
이 짧은 시간이 우리 셋의 기억 속에 길게 남기를 바라서일 것이다.


[못다한 사진이야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