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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진 Jan 11. 2022

모두가 공부하는 곳, '정독도서관'을 산책하는 이방인

푹푹 찌는 더위에 정독도서관엘 다녀왔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진 않았다. 산책하러 갔다. 도서관 내부 자체가 예뻐서 놀러 간 적은 있는데 도서관 주변이 예뻐서 산책을 하러 간 건 처음이었다. 뭔가 나름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산책하러, 놀러 가다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정독도서관은 종로구 북촌 언덕에 있어서 열심히 걸어 올라왔다. 나는 산책을 다닐 때면 눈을 가만 두지 않는데 길 반대편의 모습이 너무 여름여름해서 한 장 찍었다. 올라오는 길에 편집샵 오브젝트에 들른 것은 덤!


서울교육박물관이 먼저 보였다. 박물관 앞에 있는 나무들도 멋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여름의 수식어는 '풍성한'인 것 같다. 풍성한, 부유한, 넘치는 그런 단어들. 쪼잔하지 않고 넓은 마음을 가진 대인배 같은 단어들. 숨기지 않고 마구 티 내는 존재들.


그렇게 사진을 몇 장 찍고 교육박물관에서 뒤로 들어와 정독도서관에 도착했다. 사실 글을 쓰는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까지 몰랐는데 이곳은 서울시가 경기고등학교를 인수해서 만든 곳이라고 한다. 어째 세련되지는 않은, 굉장히 미로 같고 신기했던 도서관 내부가 예전에 학교였다고 하니 이해가 된다.


정독도서관 입구! 빨간 꽃의 채도를 보면 얼마나 태양이 뜨거웠던 날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건물 내부로 들어가지는 않았고 주변을 돌아봤다.


화단의 풀이 복슬복슬한 이끼 같았던 학교 건물 근처,


몇백 년 보호수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늠름하게 정독도서관을 지키고 있는 나무 한 그루,


도서관 구석 한쪽의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작은 연못까지. 일반적인 도서관이라고 하기에는 산책하고, 휴식하기 너무 좋은 공간이었다. 그래서 앉아서 쉬는 시민들도 많았다. 물론 도서관이라는 장소 특성상 다른 공부하는 분들께 거슬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조심하며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또 너무 좋았던 곳이 바로 건물 뒤편이다. 길리 슈트가 떠오르는 큰 나무가 있었는데 이 거대한 나무가 여름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게 너무 좋았다. 여름 바람은 텁텁하고 뜨거운 바람만 있는 게 아니다. 여름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어딘가 미지근한 촉감 난 그 모든 게 좋다. 특히나 이렇게 몸집이 거대하면서 축 늘어진 나무가 여름 바람을 맞을 때는 그 매력이 배가 된다. 더욱 많이 춤을 추니까.


다리로 올라갔다. 동생이 내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었으나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단 한 장이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다리에서 나무를 바라보자니 이 세계의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사람이 없어서 미스터리 한데, 입구는 이곳저곳 잠겨 있고, 건물 구조가 특이하고 오묘했기 때문이다.


도서관 한 구석에 있던 영문 모를 설치물

내가 사는 서울 안에서, 외부와 단절되어 있고, 까딱하면 길을 잃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곳은 다른 세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의 예상치 못한 침입자(?)


나는 다리가 너무 좋아서 다리에 서있다가 먼저 내려간 동생을 한 컷 찍어주었다. 동생과 나는 같은 곳을 다녀도 보는 시야가 너무 다르다. 나는 지금 동생이 찍고 있는 저 건물을 찍지 않았다.


동생은 예쁜 건축물을 더 좋아하고, 나는 예쁜 자연을 더 좋아하는데 정독도서관은 자연도 건물도 예뻐서 둘 다 만족했던 곳이었다. 동생에게 가자고 건물 사진을 보여줬더니 흔쾌히 오케이 했었다.


내가 찍은 사진은 건물의 모양이나, 사진의 수평수직배치가 중요하긴 해도 결국 자연이 주인공이다. 건물이나 길은 자연이 더 멋지게 보이도록 구도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가운데 사진도, 가장 오른쪽 사진도 그렇다. 길과 건물의 멋이 함께 담겼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나무에 초점을 맞춰서 찍었다.


그래서인지 동생은 이런 사진을 더 좋아했다. 건축물이 담긴 사진. 오른쪽 건물을 보고 이곳에 같이 오기로 마음을 먹었었고, 내가 찍었던 왼쪽 사진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자연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건축물을 찍는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은근히? 아니 정말 어렵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 바로 이 나무이다. 약간 기울어져 있는 나무와 뒤에 보이는 계단, 건물들이 한 번에 담긴 게 굉장히 특이했다. 여기에 잠깐 앉아서 찍은 많은 사진들을 골라 인스타에 올리곤 '곳곳이 수상하고 이상한 곳'이라고 캡션을 달았던 기억이 난다.


일정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어서 좋았다. 새로웠고, 색달랐다.

 

그렇게 책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채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정독도서관 나들이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두 번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오면 안 될 곳에 왔다는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짙은 여름의 우아함을 양껏 즐기다가 왔기 때문에 후회는 남지 않는다. 그냥 2021년 어느 여름날, 그날 하루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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