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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Aug 02. 2020

곳곳의 따스한 배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6일 차 : Estella - Los Acros ( 21km)


 이제 눈을 뜨면 몸이 자연스럽게 정해진 루틴대로 움직인다.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얼굴에 로션과 선크림을 쓱 바르고, 마지막으로 하루의 보금자리까지 정리하면 끝! 준비를 하니까 7시가 좀 넘은 시간,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오늘의 길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와인의 샘'으로 불리는데 순례자들에게 제공되는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이다. 순례자들은 이 곳에서 잠시 멈춰서 공짜로 와인을 마실 수가 있다. 이 코스를 걷기 전까지 종종 '공짜로 와인이 나오는 곳이 있다'는 말이 나왔었는데 드디어 볼 수 있다니.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며 걷다 보니 금방 마을 밖에 도달했는데 왠지 모르게 길 옆에 사람들이 좀 모여 있다. 뭐지 싶어서 살짝 보니, 찾고 있던 수도꼭지가 떡 하니 있다. 여기구나.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 고요한 하늘

 이라체라는 글씨 아래에, 왼쪽에는 Vino(와인), 오른쪽에는 Agua(물)라고 적혀 있는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다. 왔으니 맛은 한 번 봐야지. 수도꼭지를 돌려 물통에 와인을 조금 받아서 한 번씩 맛을 보았는데 느낌이 묘하다. 걷다가 길 위에서, 그것도 아침에 맛보는 와인이라니. 한국에 있으면 해 볼 일이 전혀 없을 일인데. 목에 스치는 진한 포도향과 함께 느껴지는 쌉쌀한 맛이 잠깐이나마 달게 느껴진다.


 마치 다른 세계 속으로 걷고 있는 것처럼 붉은색을 은은하게 품고 있는 하늘과 넓은 갈색의 밭이 오묘하게 조화롭다. 황홀한 하늘을 보며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다 보니 잠시 쉬어갈 만한 바(bar)를 발견했다. 차차 언니와 썬 오빠랑 여기서 쉬어가자고 하고 바로 들어갔다. 짐을 내리고 신발끈도 잠시 느슨하게 하고 마실 것과 오믈렛을 주문을 했다.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콜라인데 여기서 먹는 시원한 콜라 한 잔은 정말 숨통이 뻐엉! 하고 뚫린다. 겹겹이 쌓인 피로가 촤악 하고 내려가는 기분까지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는 잠깐의 행복. 언니 오빠 덕분에 잘 먹고 편하게 쉬다 보니 눌러앉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지만... 얼른 이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키기로 했다.

느끼는 것 만큼 사진에 담길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걷는데 속도가 붙어 오늘은 어제보다 더 빨리 도착해버렸다. 일부러 빨리 걸은 건 아닌데, 점점 걷는 시간이 단축되고 있다. 어제는 두시 전에 도착했는데 오늘은 한 시정도에 도착한 것을 보니, 거리는 어제와 비슷한데 길이 까다로운 편이 아니라서 좀 더 일찍 온 것 같다. 숙소까지 가는 도중에 레스토랑 밖에 널찍하게 자리가 있는 가게를 보고 씻은 후 여기서 점심을 먹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드디어 알베르게 도착! 매우 여유로운 도착이다.


여권과 순례자 여권을 꺼내 절차를 밟은 후 바로 숙소로 직행.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을 후딱 내려놓고 씻을 거 챙겨서 화장실로 갔다. 아무리 평탄한 코스였다고 해도 발바닥과 어깨가 후끈거리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나마 걷고 나서 이렇게 씻는 순간이 그 열기를 조금 식혀주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순간이 참 좋다. 집에서 씻을 때는 귀찮을 때도 많았는데 와서 매일을 걷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촤악 하고 나오면 온몸에서 아우성치는 통증들이 촤악하고 가라앉는다. 하루의 피로가 잠깐 잊히는 이 순간이 참 값지다.


 이렇게 이른 점심시간에 몸을 씻고 레스토랑에 가다니. 9명이 모인 첫 회동이다. 아까 봐 둔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함께 둘러앉았다. 여유롭게 메뉴판을 보고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골랐더니 피자랑 파스타와 함께 당연히 곁들여지는 맥주까지, 금세 한 상차림이 차려졌다. 1인 1 피자라니. 아마 현재까지 걸으면서 바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거하게 먹었던 음식이 아닐까 싶다.

1인 1피자, 친구의 따뜻한 마음

 같이 둘러앉아 먹으니 정말 꿀맛이다. 그리고 걷고 난 후의 맥주 한 잔은... 정말 최고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살이 빠질 수 없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뭐 그래도 좋다. 무지하게. 옆 테이블에 있던 스페인 친구 이삭을 다시 만나 스페인의 술, 샹그리아도 대접받았다. 와인이 조금 씁쓸해서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샹그리아는 와인의 쓴맛을 오렌지, 레몬 등의 과일을 넣어서 중화시켰는지 와인임에도 달콤한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금방 동이 났다.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여전히 해가 따스한데 이대로 들어가긴 아쉬워 동네 구경에 나섰다. 근처에 가볼만한 성당이 있다고 해서 그쪽으로 향했다. 수세기를 거쳐 고딕,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까지 더해진 성당이라는 이 곳, 산타 마리아 성당은 한눈에 봐도 아름답고 웅장했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은근한 볼거리이자 묘미 중 하나가 바로 성당 구경인데, 왠지 다 똑같이 생긴 것 같다가도 조금씩 각 성당 별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건축의 문외한인 내가 봐도 볼 때마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정교하고도 이색적이기까지 하다.  

산타 마리아 성당, 와인 주머니

 한편으로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 경우에는 주로 교회 외부와 내부의 모양을 유심히 보게 되는데 높은 천장 꼭대기부터 사방을 둘러보아도 대충 만들어 놓은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이런 아름다운 성당들을 볼 때면 신앙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잘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신념에 대한 간절한 마음, 그리고 정성이 성당 구석구석에 묻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짧은 성당 투어를 끝내고 난 뒤 간단하게 장까지 보고 나니 이제야 저녁이다. 둘러볼 수 있는 만큼 보았음에도 여전히 남은 시간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일기장과 펜 하나를 꺼내 의자에 앉아 잠깐 나만의 여유를 즐기기도 하고. 그러다 한 친구가 들고 있던 주머니가 궁금해져 용도를 물었더니, 와인 주머니라는 말에 알려주는 대로 한 번 먹어보기도 하고. 잔잔하지만 여유로운 오늘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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