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하루 종일 이동을 하는 날. 근처에 있는 메트로를 어떻게 가야 하나 하고 길을 찾고 있는데 게스트하우스 이모께서 데려다 줄테니까 얼른 나오라고 하신다. 어제처럼 길을 헤매다 차를 놓칠까 걱정이 된다고. 분명히 가는 길이 가깝다고 했는데 가면서 보니 길이 꽤 복잡하다. 혼자였다면... 어제의 반복이었으리라.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하며 마음을 쓸어내렸다.
"저기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보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도통 보이지가 않는다. 도대체 지하철역이 어디지. 당연하게 여기가 지하철역이야 라고 뭔가가 크게 있을 줄 알고 찾고 있으니 보일 리가 있나. 아, 여기 프랑스지 하고 다시 보니 귀퉁이에 작은 표시와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이모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까르네를 끊고 개찰구를 통과했다. 시간을 보니 곧 열차가 오는 것 같은데. 이대로 가면 꽤 여유롭다. 마음 편하게 얼른 와라 하고 있었는데 웬걸. 정차한 열차 안에 사람이 빼곡하다. 아무리 봐도 큰 배낭과 함께 들어갈 공간이 전혀 없다. 다음 차 타지 뭐. 다행스럽게 차는 금방 왔는데 또 만차다. 다음 차는 괜찮겠지 하고 쿨하게 보냈는데 헛된 희망의 연속. 이제는 무조건 타야 한다. 제발 틈이라도 있어라 하고 주문을 외우다시피 한 게 효과가 있었나. 이번엔 탔다.
20분 정도를 달렸더니 몽파르나스역에 무사히 도착했다. 잘 내리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 타야 하는 기차가 좀 오래가는 거니까 사람들이 짐을 들고 가지 않을까 싶은데... 눈치껏 한아름 짐을 들고 가는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같이 따라갔다. 바삐 걷다 보니 큰 에스컬레이터가 보였다. 시간을 보니 좀 빨리 걸어야겠다. 안내해주는 사람에게 가서 미리 예약한 바욘행 TGV 티켓을 보여주니 2층으로 올라가라고 알려주었다. 거의 뛰다시피 올라갔더니 탑승까지 한 10분의 여유가 있다. 4시간의 열차여행인데 빈손으로 갈 수 있나. 초콜릿 한 봉지랑 물 하나 사서 탑승 완료!
12시 16분. 거침없이 달리는 TGV(테제베) 안, 가만히 앉아 트윅스를 먹으며 밖을 보니 하늘이 참 맑다. 밖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퍼지기도. 이 순간에 음악이 빠질 수 없지. 학창 시절, 매일 함께 였던 아이리버를 챙겨 오기를 잘했다. 오랜만에 Jessie J의 'Domino'를 틀고 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설렘과 긴장감, 동시에 여러 궁금증까지 일렁인다. 미치도록 오고 싶었던 이 길은 어떤 곳일까. 어떤 길이 될까. 가만히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니 뭉클함, 감사함, 걱정 등의 여러 감정이 느껴진다. 갑자기 올라오는 울컥 함들이 낯설기도 하고 묘하다. 아무래도 한껏 감성에 젖어들었나 보다.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를 들으니 가사처럼 정말 반짝거리는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밖은 푸릇푸릇하고 해는 높게 떠있고, 풍경은 계속 바뀐다. 왠지 시골 할머니 댁을 지나는 느낌도 들고. 몽글몽글한 탓에 기분도 좋다. 노래도 듣고, 열차 구경도 하고, 일기도 쓰다 보니 4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도착한 거 같아서 아쉽기까지 하다. 이제 바욘 역에서 내려서 다시 한번 열차를 갈아타면 된다. 내리는 사람들을 보니 큰 배낭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오고 가는 여러 언어 중 간혹 한국어가 들리기도 하고. 생장행 티켓을 구매하고 나니 시간이 좀 남는데. 잠깐이라도 마을 구경하고 와야겠다. 배낭을 들고 바로 나왔는데 정말 쨍한 햇빛, 장난 아니다. 빛의 이글거림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길을 건너 골목으로 들어갔다.
집마다 달려있는 창문이 빨간색으로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는 게 아기자기하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혼자 조용히 길을 따라가다 보니 오래된 책이 있는 작은 책방도 보이고, 방향을 바꿔서 다른 쪽으로 가니 모자를 쓴 할아버지들끼리 프랑스어로 얘기를 하고 있다. 좀 더 걸으니까 강도 보인다. 사진으로 이 순간들을 다 담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싶어서 괜히 한 번 더 둘러보고 공기도 크게 마셔본다. 크게 숨을 몇 번 쉬었다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뭘 먹지 고민하다가 프랑스에서 빵은 꼭 한 번 먹어봐야지 했는데 여태 못 먹은 게 떠올랐다. 빵집을 찾는 건 쉽지. 고소한 빵 냄새를 따라 들어가면 되니까! 역시 금방 찾은 곳에서 갓 나온 빵을 물어 하나를 샀다. 솔직히 눈이 번쩍 뜨일 만큼의 맛은 아니었지만 흔히 말하는 겉바속촉, 겉의 바삭함과 촉촉한 속이 만족스러웠다. 주변의 음식점도 한 번 둘러보고 나니 다시 열차에 탈 시간이다.
오늘의 마지막 열차, 생장행에 오르니 한 눈에 봐도 순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mp3를 꺼냈고 이어폰을 꽂고 나니 몸이 들썩들썩한다. 음악을 들으며 경치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도착. 내려서 사람들이 가는 길 따라가면 된다고 했는데 얼떨결에 첫 번째로 내려버렸다. 잠시 멈칫하고 두리번거렸더니 한 친구가 와서 이 길 맞다고 하면서 함께 나란히 걷게 되었다. 생장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였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순례자 사무소 앞에 도착했다.
다행스럽게도 사무실 앞에 줄이 별로 없어서 거의 바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았다. 55번 공립 알베르게가 아직 자리가 있다고 해서 기분 좋게 길 따라 올라갔더니 보이는 숫자 55. 안으로 들어가니까 이미 와있는 다른 순례자들이 꽤 있다. 기다리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관리자가 왔고, 순례자 여권에 첫 도장을 찍고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배정받은 침대에서 밖을 내다보니 날씨가 너무 좋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다. 이런 풍경 속에 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줄을 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고, 게스트하우스에 놓고 온 스틱을 다시 사고 내일 먹을 것도 좀 사기로 했다. 마트에는 순례길에서 필요한 것들 거의 전부 있었다. 아무것도 안 들고 와도 갈 수 있을 정도로. 무겁게 다 들고 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정말이었구나. 저녁으로 주인이 추천한 순례자 메뉴 두 종류를 시켰는데... 이런. 맛이 있는 게 맥주뿐이다. 고기는 고무를 씹는 것 같고 수프로 나온 음식은 엄청 비리다. 부디 이 집의 음식만 이런 것이길 바라며 다시 알베르게로 컴백.
침낭을 깔고 누워 본 게 언제인지. 알베르게에서는 여러 사람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침대이기도 하고 베드 버그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주로 침낭을 펴고 잔다. 침낭에서 잔다고 안 물리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확률을 줄여보고자 하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해서 눕긴 누웠는데... 눈도 마음도 잠들 생각이 없나 보다.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지. 여전히 신기하고 생각을 할수록 웃음이 난다. 단지 여기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내일부터 정말 산티아고를 향해 걷는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다. 들뜬 마음을 조금 다스리고 자볼까 했지만 이제 막 시작된 드르렁 코 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등 익숙하고도 낯선 합주가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잠자는 건 순탄해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좋다!
10kg의 배낭과 함께 끝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길.
앞으로 수없이 외치게 될 말이지만 아직은 낯선 말,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