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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Aug 16. 2020

적당히의 미덕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8일 차 : Logroño - Najera (29km)


 아 지독한 숙취. 어제의 여파가 계속 남아있다. 머리를 콕콕 찌르는 느낌에 엉망진창인 속까지 아주 난리구나. 머릿속에는 온통 '누워서 자고 싶다!!'는 생각뿐인데... 벌써 나가야 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타지 않겠다던 버스도 동키도 어찌나 생각이 나던지. 역시 몸이 엉망이니 생각도 들쑥날쑥 인 것 같다. 밀려오는 유혹들에 안 되겠다 싶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언니 오빠들이 라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봐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은 멍하고 눈꺼풀은 무겁고, 얼굴은 허옇게 떴다. 길을 나서면서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걸으려고 발버둥 쳤던 것 같다. 계속 걷다 보면 나아지겠지라는 생각만으로 열심히 걷고 또 걸었더니 점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허옇던 얼굴색이 제 색깔을 찾기 시작하면서 생각보다 빨리 술이 깨기 시작했다. 협쓰가 준 우루사의 힘인가. 덕분에 이틀 치 분량의 물을 털어 넣고 점심은 든든하게 먹을 수 있었다.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니 보이는 것들

 한국에서는 잘 먹지도 않았던 콜라인데 여기서는 어찌나 달콤한지. 특히 걷다가 시원한 콜라 한 잔 하면, 다들 왜 콜라 한 잔이 필수라고 하는지 고개가 절로 끄덕거린다. 벌컥벌컥 마시는 시원한 콜라, 달달함과 동시에 톡 쏘는 맛에 감히 대체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잠시나마 체력을 충전하고 다시 출발. 


 꽤 많이 걸어왔기에 조금만 더 힘내자며 다시 걸었다. 와 오늘은 진짜 덥다. 해가 너무 뜨거워서 처음으로 바람막이도 벗고, 팔을 걷고, 꺼낼까 말까 고민만 했던 모자도 꺼내 썼다. 걸으면서 느끼는 거지만... 지금 이곳이 여름이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알베르게 가는 길

 긴 거리에 지쳐 슬슬 다리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다리가 알아서 혼자 걷고 있는 느낌까지 들기 시작하면서 얼른 숙소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드디어 마을에 도착을 했는데 가려고 하는 알베르게를 보니 좀 더 걸어야 한다. 오늘 묵는 곳은 기존에 갔었던 곳과는 조금 다르다. 기부로 운영되는 알베르게로 따로 숙박료를 내지 않고 묵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베드 버그가 많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나름 깔끔해 보여서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알베르게를 찾느라 남은 힘을 다 쏟았지만, 그럼에도 무사히 또 하루를 끝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가방을 벗자마자 눕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다잡고 씻으러 갔다. 항상 씻으러 가는 그 길목까지가 힘들 뿐이니까. 역시 목욕 후 느껴지는 행복이란, 아주 노곤 노곤하다. 딱 하나, 저릿한 다리를 빼면 다 좋다. 

너무 그리웠던 라면들과 마무리까지

 원래는 씻고 근처에 있는 중식당에 가볼까 했는데 도저히 나갈 자신이 없어서 썬 오빠가 가져온 신라면이랑 짜파게티를 해서 먹기로 했다. 아침에 못 먹은 라면이 계속 생각났었는데 이렇게 먹는구나. 샐러드랑 같이 놓고 먹으니까 왠지 건강해지는 느낌까지 든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좀 맵긴 했지만 남은 국물에 누룽지까지 완벽 클리어다. 볼똑하게 나온 배를 퉁퉁거리며 앉아 있자니 졸음이 솔솔 온다. 비록 하루의 절반은 와인의 뒤끝에 휘청거렸지만 오늘도 잘 걸었고, 또 그 나름대로 느낀 게 많은 하루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당분간은 와인과 멀어질 거라는 것. 하하. 내일도 좋은 하루가 되길 바라며 이만 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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