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15일 차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28.5km)
이제 걷는 게 익숙해졌나. 종아리가 띵띵 붓긴 해도 왼쪽 발만큼은 꽤 안정적이다. 양쪽이 다 그러면 좋으련만 오른쪽 발등은 여전히 말썽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걷는데 문제는 없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선선한 날씨 탓에 걸음이 가볍다. 웬 중세시대 성문 같은 곳도 지나고, 오늘도 쭈욱 평야가 펼쳐졌다. 순례자들이 가장 지루함을 느끼는 구간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 어마어마한 평야 길, 메세타 평원. 부르고스부터 레온까지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열심히 걷다 보니 벌써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역시나 바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 매일 오는 시간이지만 항상 기다려지는 아침 시간, 그렇게 빵이랑 또르띠야를 먹었는데도 여전히 좋은 걸 보면 빵순이가 틀림없다. 머핀까지 든든히 챙겨 먹고, 세요를 찍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근쓰랑 걷는 속도가 맞아서 같이 걸었다. 이야기도 잘 통한 탓에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기도 했다. 걷다가 노래를 틀어 놓기도 하고, 대화를 하며 걷다 보니 평야지만 그리 지루하지 않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걷다 보니 확실히 힘이 나기도 했다. 특히 잠깐 있는 오르막길에서 숨이 찰 때마다 노래의 가사를 되뇌며 올라가다 보니 순식간에 위에 도달했다. 그렇게 노래도 따라 부르고, 신이 나면 나름의 춤을 추기도 하며 한없이 계속되는 평야를 걸었다.
이 곳을 지나다 보니 나름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평탄한 길에서 오는 약간의 지루함이 있지만 한편으로 걷는데 부담이 적은 편이다. 그래서 본인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내 경우, 약 200km 정도 되는 이 구간을 얼른 걷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 숨이 턱 막혔지만 매일 걸을 수 있는 만큼 걷고, 지루할 땐 음악도 듣고 또 사람들과 함께 하다 보면 추억이 정말 많은 구간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매일 걷는 거리를 계산을 해보니, 이렇게 걸으면 처음에 목표로 잡았던 날짜보다 며칠을 앞당길 수 있을 것 같다.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라면 이 방법도 괜찮을 것 같다. 모두의 찬성으로 오늘은 35km를 걷는 대신 무리하지 않고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알베르게를 들어가는데 웬걸, 들어가는 길이 예사롭지 않다. 독특하기도 하고, 초록색의 잔디들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지금까지 머물렀던 여느 알베르게에서도 보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너나 할 거 없이 잔디에 누워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 햇빛에 말려지는 빨래들, 그리고 파란 하늘에 적당한 구름까지. 하늘의 색, 잔디의 색이 뚜렷해서 더욱 빛이 났고 순간이 너무 아름다웠다.
씻고 둘러앉아 마무리 맥주까지 한 잔 하니 솨아-하고 온 몸의 긴장이 풀린다. 따뜻한 햇빛을 잠시 누려야겠다. 이제 남은 일은 딱 한 가지다. 맛있게 저녁 먹고 잠들기. 현재의 작은 소망 하나, 순례자 메뉴가 맛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