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10일 차 : Santo Domingo de la Calzada - Belorado (22.7km)
여기 날씨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괜찮은 날씨네 하다가도 한순간에 변해버리기에 쉽사리 단정 지을 수 없다. 오늘은, 공기가 쌀쌀하다. 평소처럼 레깅스에, 긴팔에, 바람막이까지 입고 나왔는데 어제와는 사뭇 다른 날씨. 어제 비가 온 탓인가, 으슬으슬한 게 몸을 더 움직여야겠다.
작은 위안이 있다면 그래도 22km라는 것. 거참, 이젠 이 정도의 거리가 위안이 되다니. 괜스레 느껴지는 자그마한 뿌듯함이란,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진다. 근데 이 날씨가... 또다시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는 제법 하늘이 맑았는데, 푸드트럭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오기 시작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우선 아침부터 먹고 생각하는 걸로. 이제는 익숙해진 주문, "오믈렛 우노, 샌드위치 우노"
비도 오고, 급하게 갈 이유도 없고. 최대한 여유롭게 먹었는데도 비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무래도 오늘은 계속 비가 오는 날이구나, 체념하며 배낭에 주섬주섬 레인커버 씌우고 출발. 보아하니 비가 계속 올 것 같아 아예 우의도 꺼내 놓아야겠다. 오늘따라 해가 참 그립구나. 해가 끝내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걷는 동안 계속 한기를 느낀 채로 걸어야 했다. 그래도 좋은 게 딱하나 있다면 너무나도 선명한 무지개를 봤다는 것이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한 무지개를 보니 잠시나마 한껏 신이 난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
걸을수록 발에 있는 물집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양 쪽에 물집이 생겨서 은근하게 아프고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의 강도가 짙어져 이내 걱정도 되고. 멈추면 다시 느껴야 하는 통증을 생각하니 차마 멈출 수는 없다. 그래서 점심 먹기 직전까지 정말 정신없이 걸었다. 그래도 일단 밥은 먹어야 하니까 잠시 쉬었다 가야지. 점심을 해결할 만한 곳을 발견해서 쉬었다가 다시 신발을 신는데 와우... 발바닥이랑 발등이 너무 아파서 발을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상태라면 성큼성큼 잘 걸을 텐데, 오늘 상태는 메롱이군. 이렇게 걷다가는 더 오래 걸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에라 그냥 꾹 참고 걷자.
방안에 베드가 딱 일행 수만큼이라 다 같이 한 방을 쓰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오늘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없을 확률이 크기에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겠다. 일단 바로 씻으러 가야지. 땃땃한 물에 온몸을 던지고 나니, 뭉쳐있던 피로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고 있다.
물먹은 수건이 되어버린 듯한 몸을 이끌고 돌아왔는데 협쓰가 물집을 봐주고 있었다. 며칠을 애매하게 괴롭히던 발을 보여주었더니 "이거 터치자" 한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바로 섬세한 터치 한방에 끝! 바늘로 톡 하고 물집을 터뜨려서 물을 뺐다. 그런데 정말 하나도 안 아파서 신기하다. 진즉에 할걸. 마무리로 테이핑까지. 왼발 하나, 오른발 하나, 계속 신경이 쓰이던 물집들이 처리되고 나니까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더러울 수 있는 발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해 준 협쓰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다 같이 밖으로 나왔다.
가려고 하는 레스토랑 오픈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날이 추워 일단 가까운 바에 가서 한 잔 하기로. 잠시나마 맥주를 먹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역시 의미 없는 고민이었음을 또 깨닫는다. 오늘 가려고 하는 곳은 한국인들이 사이에서 이미 맛집이라고 소문나 있는 곳으로, 주 메뉴로는 폭립과 대구요리가 있다. 오픈 시간에 맞춰서 레스토랑에 갔더니 이미 와있는 사람이 있었다. 음식을 먹어보니 과연 맛집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 맞네.
아끼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맛도 맛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식사는 꽤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맛이며, 분위기며, 가장 중요한 함께 먹는 사람들까지 완벽했으니까. 또한 유럽에 온 이후로 가장 그럴싸한 레스토랑 음식이기도 하고. 행복한 만찬 후라 배가 아주 빵빵하다. 이제 잠이 솔솔 올 거 같다. 하루의 마지막까지 비가 내리고 있지만 내일은 해를 볼 수 있길. 나의 발등도 좀 괜찮길. 이제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