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9일 차 : Najera - Santo Domingo de la Calzada(20.93km)
오늘은 8km나 덜 걷는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여유가 가득하다. 귀마개 꽂고 바로 잠들어서 아침까지 안 깼더니 개운하기까지. 출발이 좋다. 하나둘씩 정리하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져 덩달아 준비를 시작했다.
잠도 잘 잤겠다, 날씨도 좋고, 21km 정도는 뭐 쉽지~ 하는 즐거운 생각들이 모이니 참 기분 좋은 아침이다. 어제 남겨놓았던 샐러드를 먹고, 배낭을 메고 다시 출발~! 오늘은 거리에 여유가 있으니까 혜니 언니랑 천천히 걸어야지. 그래도 이게 계속 걷다 보니까 체력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첫날에는 숨이 턱턱 막혔었는데 이제 웬만한 길은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발은 여전히 아프지만 걷는 스킬이 점점 늘어가는 느낌이랄까.
알베르게를 나서면서부터 왁자지껄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궁쓰의 재치로 웃으면서 시작이다. 여기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다 각자의 스타일이 뚜렷한데 그중에서 궁쓰는 정말 독보적으로 유쾌하다. 일단 무슨 말만 하면 웃음부터 나오는데 어떻게 저렇게 재미있게 말을 잘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매번 든다. 웃기는 센스가 어찌나 좋은지 작은 것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어이 웃긴다.
정말 너무 재미있어서 웃다가 입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 재치 있는데 남을 깎아내리는 유머도 아니고 편안하고 정이 넘쳐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주는 게 아닐까 싶다. 혜니 언니와의 티키타카도 얼마나 잘 맞고 예쁜지. 이 부부를 보고 있자면 어느새 미소가 슬며시 피어난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계속 옆에 있고 싶기도 하다. 오빠가 무슨 말을 해도 너무 자연스럽게 잘 받아주는 언니를 보며 서로에게 이런 짝이 있다면 참 행복하겠다, 하는 막연한 생각도 해본다. 순수하고 재미있게 사는 모습이 멋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닮고 싶기도 한 마음에 더 옆에 있고 싶은 것 같다.
쨍한 햇볕이 계속되니까 너무 덥긴 한데 그래도 중간중간 사진도 찍고 얘기하면서 걸으니까 거리가 슝슝 줄어드는 것 같다. 같이 걷기도 하고 잠시 헤어지기도 하면서 각자의 속도대로 걷는다. 한없이 펼쳐진 길에 띄엄띄엄 보이는 소중한 그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다. 순례길을 걸으면 혼자가 되는 순간이 더 많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도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다. 선생님, 이모들, 협쓰, 쑥 언니, 궁쓰, 썬 오빠, 혜니 언니, 슬 언니, 주서기, 다니엘까지. 참 좋은 사람들이다.
장볼시간도 여유롭고, 마침 쑥 언니의 생일이라 케이크까지 구매 완료. 늘 하는 마트 구경이지만 할 때마다 별천지에 온 느낌이랄까. 뽈뽀(Pulpo)라는 것도 처음으로 먹어봤는데 짭짜롬하니 꽤 맛이 좋다. 복작거리며 언니 모르게 깜짝 파티를 준비한다고 했는데 누가 봐도 어설프다. 하하. 그래도 언니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각자 성격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지만 어느덧 좋은 것이 있으면 생각나고, 같이 나누고, 서로를 챙기는 사이가 되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런 점에서는 모두가 비슷해서 더 마음이 가는 게 아닐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웃을 일도 많아지고, 함께 살아가는 삶이 참 중요하구나 하고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이 곳까지 안고 온 나름의 걱정거리들이 큰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아닐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들고,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잘 해결될 거라는 무언의 믿음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잘 보내다 보면 내 안의 여러 질문들에 조금은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