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7일 차 : Los Acros - Logroño (28km)
오늘의 목적지는 로그로뇨. 이 곳을 특히 기다린 이유가 있는데 바로 타파스 거리 때문이다. 타파스란 본 요리 전에 작은 접시에 나오는 전채요리를 말하는데 종류가 정말 다양하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인 타파스. 게다가 와인까지 더해진다고 하니 기대가 한껏 올라가 있다. 오늘도 열심히 걷고 타파스로 마무리하자며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비가 온다고 했는데 왠지 날씨가 좋을 것 같은 느낌. 오늘도 너무나 예쁜 하늘이다. 이 지금, 잠깐의 시간 동안만 불그스름한 여운을 남기는 해가 어찌나 예쁜지. 하늘을 보기도 하고, 펼쳐진 들판을 보기도 하며, 걷고 또 걷는다. 28km, 왠지 모르게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는 거리지만...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탁 트인 벌판에 한 명, 또 한 명, 걷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길이 주는 묘한 매력 하나,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정이 간다는 것. 올라(Hola:안녕)와 부엔 까미노(Buen camino:좋은 길 되세요)는 무적의 단어다. 올라하고 먼저 인사를 하고 서로 눈을 마주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로 마주하게 된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각자의 길을 응원하는 의미에서의 부엔 까미노는 자연스럽지만 진심이 담긴 마무리 인사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만능열쇠를 갖고 있다면 길에서의 인연과 어렵지 않게 가까워질 수 있다. 특히 길을 걷다가 지루할 때, 힘이 들 때, 누군가와 말을 하고 싶을 때 정말 좋다. 항상 이 올라와 부엔 까미노로 스리슬쩍 다가갔다.
걷다 보니 돌탑이 가득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언가를 바라며 돌탑을 쌓는 건 어디에나 있나 보다. 잠깐 작은 돌 하나 얹어볼까 했지만 공들여 쌓은 탑들 망칠세라 그냥 눈에만 담아두기로 했다. 근데 몇 개는 제법 높아 보이는데 도대체 누가 저만큼이나 쌓아놓았을까. 간절함이 꽤 높았나 보다. 나름의 추측을 하며 높은 탑들을 보고 있자니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많구나 싶다. 한편으로는 같은 자리에서 긴 시간 동안 가만히 쌓인 대로 서 있었을 돌탑들을 생각하니 괜히 경건해지는 느낌이다.
이제 슬슬 배가 고픈데. 눈빛을 보니 다들 배가 고픈 눈치. 잠시 멈춰서 마을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거리를 걷다가 길목에 있는 가게에 자리를 잡았다. 어흑. 얼마 만에 붙이는 엉덩이인지. 신발끈도 잠시 풀고 메뉴를 골랐다. 바게트 빵에 계란부침이 들어가 있는 걸 골랐더니 딱 예상 가능한 그 맛이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두 가지이기에 맛이 나쁘지 않다. 가만히 앉아 빵 먹으면서 하늘을 보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따스하게 느껴지는 볕이 좋고 왁자지껄 들리는 말소리도 좋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더니 거의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제는 다시 가야 할 시간이다.
도착지에 점점 다가워질수록 종아리가 엄청 당기고 발목도 뻐근해졌다. 그래도 많이 쉰만큼 쉬지 않고 걸었더니 벌써 도착이다. 알베르게에 들어서니 익숙한 얼굴들이 좀 보인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쪼르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이젠 물어보지 않아도 미리 준비하는 센스는 곧 빨리 들어가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아이고 힘들긴 했다. 28km.
아침에 길을 나서기 전, 비 예보가 있다는 말에 동키를 할지 말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날이 괜찮았다. 사실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면 가볍게 걸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온전하게 내 짐을 들고 걷고 싶었기에 마다했다. '배낭 메고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라는 목표를 위해. 운이 좋아서 산티아고에 도달하는 그 날까지 건강한 몸으로 배낭과 함께 걷고 싶다.
씻고 나서 알베르게에 마당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빨래가 되기를 기다렸다. 세탁하고 건조까지 하면 딱 시간이 맞을 것 같다. 비가 온다고 했었는데 여전히 날씨가 좋아서 빨래를 후딱 해치웠다. 처음으로 손빨래가 아닌 세탁기를 썼는데... 역시 기계의 힘은 달콤하다. 다 같이 돌리니까 싸기도 하고. 그 달달한 맛을 봤기에 앞으로도 세탁기에 손이 갈 것 같다.
드디어 빨래 지옥 탈출! 기다리고 기다렸던 타파스를 먹으러 나갔다. 군데군데 보이는 가게들도 구경하다 보니 유명한 타파스 거리가 금방 보였다. 양송이 구이가 맛있다고 해서 첫 시작을 그쪽에서 하기로 했다. 가게까지 가는 길에 타파스 거리가 주욱 늘어서 있는데, 보니까 한 번씩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이 타파스를 즐기고 있었다. 우선 1인당 10유로씩 내고 네 곳을 돌아다니며 와인과 안주를 먹기 시작했다.
안주 하나, 와인 한잔. 이렇게 하나둘씩 먹다 보니 금방 동이 났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며, 맛있는 와인까지 더해졌으니 순간의 행복이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 그러다 한 가게에 들어가서 아예 와인을 통째로 시켜서 먹다가 제멋대로의 영어를 하며 영국에서 온 한 커플과 얘기도 하고. 찰나의 그 순간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즐겼던 것 같다. 와인 무서운지 모르고 맛있다 하면서 홀짝홀짝 목으로 넘겼는데... 기분은 좋았지만 와인도 술이었음을 잠깐 잊었다. 타파스와 와인이 적절한 양으로 들어갔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와인이 나의 수용범위를 가뿐히 넘어버렸다. 그 덕분에 숙취는 덤으로 얹어졌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방에 뛰다시피 들어왔다. 일단 눕긴 누웠는데... 침대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오늘 밤 조용히 흘러가긴 글렀다. 순탄하지 않은 밤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과연 내일 잘 걸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