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4일 차 : Pamplona-Puente la Reina : 22km
엇 이상한데. 첫날만큼 숨이 가쁘지 않다. 그 사이에 몸이 조금 적응을 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착각인지. 뭐, 어쨌든 시작이 산뜻하다.
오늘 걸을 때는 다른 관점으로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오늘 걸어야 하는 거리'에 집중하면서 얼마나 걸었지 하고 생각하면서 걸었다. 그러다 보니 다 걸은 거 같은데 실제로는 아니었을 때 혹은 힘이 들 때 얼른 끝내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짜증이 났다. 계속 하루에 걸어야 하는 '목표'에만 집중하며 힘들 때 부정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식으로는 걷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과정에 집중하기'다. 어차피 다 걸을 길이라면 웃고 즐기며 걷자 싶어서. 그렇게 한다면 힘들더라도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의 걷는 거리(목표) < 걷는 속도, 길, 느끼는 감정(과정)에 집중하면서 걸어야지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로 했다. 과정에 조금 더 집중해보기로 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답답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왠지 마음까지 가볍다. 쉬어 가는 때에도 쉬는 그 순간에 집중하려고 했다. 조금 번거로워도 양말 다 벗고, 땀도 잘 말려주면서. 여유를 느낄 땐 여유를 즐기고 걸을 땐 힘차게 걸었다.
오늘의 길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은근한 오르막과 자갈 내리막 길의 콜라보다. 잔잔히 계속 오르막이 있다가 '용서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정점을 찍는 순간 곧바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용서의 언덕'. 이름에서 오는 묵직함에 언덕을 오르면 모든 것을 용서해야 할 것 같다.
살면서 용서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 오르는 동안 천천히 생각해봤다. 타인을? 내게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진심으로 사과하고 뉘우친다면, 그리고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이라면 쉽게 용서했는데. 생각해보니 타인을 용서할 일은 그리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일단 말 자체가 낯설다. 생각해보니 스스로에게 용서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개운하지 않고 뭔가 찜찜하고 불편하다.
나는 나를 어떻게 대했을까. 그저 살기 바빠서 방치해두었나, 아니면 아꼈나? 내 경우는 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부여되는 사회적인 역할들, 가치관이라는 틀에 나를 구겨 넣기 바빴으니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방관하고 오히려 더 바쁘게 달려야 한다며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용서의 언덕을 넘으면서 용서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 자신이 될 줄이야. 낯간지럽고 미숙하지만 이 곳에서라도 나 자신을 용서해보기로 했다.
사방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언덕에 서 있자니 온몸이 휘청거린다. 줄지어 서 있는 다양한 사람 조형물을 보니 옛날에는 이렇게 언덕을 넘었겠구나 하고 상상도 해보았다. 올라오는 길에는 큰 바람개비들이 가득했는데 슬쩍 내려가는 길을 보니 돌들만 가득하다. 보자마자 나오는 한숨. 사방으로 넘쳐나는 돌만이 반겨주고 있을 뿐이라니. 마음이 조금 착잡하다. 이 정도면 원수의 길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용서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구나. 계속되는 내리막에, 발가락의 쏠림에... 그냥 웃음밖에 안 나온다. 하하!
그래도 쭉 이렇게 잘 걸었으면 좋았을 텐데... 바(bar)에서 여유 있게 쉬고 다시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비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맛 좀 봐라! 하고 누가 일부러 하늘에 구멍을 뚫고 우와악! 하고 쏟아붓는 것처럼, 자비 없는 비. 살짝 비가 내릴 때 에이 뭐 얼마 오겠어하고 걸었는데 완전 낭패다. 혜니 언니, 궁 오빠, 다니엘, 나까지 모두 당황한 채로 급히 가방에서 레인커버와 우비를 꺼냈는데 우왕좌왕 난리도 아니다. 하지만 비는 우리를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대로 있는 힘을 다해 쏟아부었다. 상황은 화가 날 법도 한데 우비 하나에 의지해서 쫄딱 젖은 서로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계속 나왔다.
신발은 이미 물로 가득해서 웅덩이를 피해 가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비를 잠깐 피해서 쉴까 고민했지만 남은 길이 멀어 보이기도 하고, 도저히 그치지 않을 것 같아서 계속 걸었다. 그런데 웬걸. 알고 보니 예상과는 다르게 목적지가 거의 코앞이었다. 게다가 마을에 도착할 때가 되니까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찰방거리는 물 찬 신발에, 온몸이 쫄딱 젖어 다른 숙소를 찾을 겨를도 없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숙소로 들어갔다.
15유로. 알아보지 않고 가장 가까운 곳에 들어갔더니 덤터기가 제법이다. 생각보다 비싸네 하고 수속을 다 끝냈는데 바로 후회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공립 알베르게가 5유로였다. 지금까지 간 숙소 중에서 가장 비싼 곳인데 어떻게 이렇게 후미질까. 위치도 베드 버그가 나올 것 같은, 아니 분명히 있어 보이는 지하에 비까지 와서 꿉꿉함이 가득한 곳이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모두 베드 버그 약부터 듬뿍 뿌리고 짐을 풀었다. 오늘 같은 날이 많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의 교훈
1. 급! 내리는 비는 금방 그친다. 걷기보다는 잠시 비를 피하자.
2. 점심은 가볍게! 바에서는 웬만하면 빨리 나오는 걸로 시키자.
3. 알베르게 후기는 꼭 확인해서 골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