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순례자의 아침엔 빠질 수 없는 루틴이 있다. 오늘은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높낮이가 어떤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고도표를 보니 높낮이 폭이 적당해 보이는 게 어제보다는 걸을만하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섣부른 판단이었다. 걸을 때마다 계속 눌리는 물집과 살이 쓸려서 따갑고 쓰린 느낌이 갈수록 더해졌기 때문이다. 역시 보는 거랑 직접 겪어보는 건 다르구나. 고도표만 대충 보고 얕보면 안 되는구나.
쉬는 것도 그 순간은 참 좋은데 다시 가려고 일어나면 와우... 도돌이표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롭게 다시 시작되는 고통에 걸음이 영 시원찮다. 어기적 어기적. 다시 익숙해지기까지 5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차라리 쉬지 말고 계속 걸을걸 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잊어버리고, 쉬고 걷고를 반복한다. 알베르게에서 조식을 먹고 나왔는데도 걷다 보니 금방 배가 출출하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랑 애매하게 맞아서 바(Bar)에서 간단히 요기만 하고 다시 걷기로 했다.
왠지 맛있어 보이는 두툼한 감자 오믈렛이 인기가 좋아 보여 시켰는데 웬걸. 한입 먹자마자 다들 눈이 똥그래졌다. 입 안에 퍼지는 부드러움과 도톰한 식감의 감자가 얼마나 조화로운지. 따뜻함과 부드러움까지 더해져 먹는 사람마다 그저 대박이라는 말을 할 뿐, 순식간에 오믈렛이 사라졌다. 하나로는 안 되겠다 싶어 하나를 더 시킬 겸 세요(도장)도 받자 싶어서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줄이 너무 길어서 오래 지체될까 봐 단념하기로 했다. 정말 코를 파고드는 진~한 기름 냄새는 나라를 막론하고 매력적이구나.
걸어야지 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느껴지는 통증들. 그래도 다행인 건 배가 든든해서 아까보다는 가볍게 무시가 되는 것 같다. 길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마주친 한 할머니께서 주신 블랙베리랑 무화과를 걸으면서 중간중간 먹기도 했다. 먹으니 오래 걸을 때에는 정말 물과 과일만큼 좋은 게 또 없구나 싶다. 갈증도 해소해주고 배도 조금 채워주고 부담스럽지가 않다. 일상이 '걷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다 보니 짐도 그렇고 준비하는 음식들도 모두 조금씩 그에 맞춰 스킬이 늘어나는 것 같다.
누군가 단톡 방에 순례자들을 인도해주는 비석에 누가 한국어로 낙서를 해놓은 사진이 있는 기사가 있다고 했는데 정말 한국어 낙서가 있는 비석이 있었다. 이거다 하고 발견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파스를 꺼내서 함께 낙서를 지우고 물티슈로 깔끔하게 닦아 완전히 지웠다. 길을 걸으면서 비석에 있는 낙서들을 종종 봤지만 막상 한국어가 써져 있는 걸 보니 창피함에 모두들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크지 않았을까.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함께, 자발적으로 한 일이기에 더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조금 지쳐가는 순간 모두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느낌이다. 덤으로 괜스레 느껴지는 뿌듯함까지.
길을 걷는 동안 아이들이 어디 있나 할 정도로 보지 못했는데, 한 마을에 도착하니까 아이들 천지다. 왜 이렇게 많지 하고 물어보니 오늘까지만 하는 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유모차를 타고 있는 갓난아기부터 제법 잘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마을이 가득하다. 어른들은 익살스럽고 무섭기도 한 큰 얼굴 가면을 의상을 입고 아이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면서 축제를 즐기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축제에,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이끌리듯 잠시 멈춰 함께 축제를 즐겼다. 마치 그곳의 아이들이 된 것처럼.
어제는 숙소가 얼마 없다는 말에 의도적으로 빠르게 걸었는데 오늘은 동행들과 함께 에어비앤비를 해서 자기로 한 날이라 어제처럼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래서인지 힘들면 지체 없이 쉬고, 또 걷고. 나름 여유롭게 걸었는데 그 나름대로 발에 무리가 되었는지 상태가 엉망이어서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인 팜플로나에 도착했을 때는 녹초였다. 그래도 마켓에 가고 싶은 마음에 함께 짧게 도시도 구경하고 고기, 술, 음식 등을 샀다. 느긋하게 도시를 둘러볼 수 있는 다리였다면 좋으련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한 걸음을 더 내디뎌 본다.
가장 좋으면서도 행복한 시간인 저녁시간. 다들 무거운 몸이지만 같이 식사 준비를 하고 둘러앉아 술도 나누었다. 라임에 설탕이랑 커피가루를 찍어서 보드카랑 마셔도 보고. 처음에 마실 땐 으 이게 뭐지 싶었는데 먹다 보니 맛있어서 몇 잔을 더 마셨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휴식을 하고 도시를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은 더 머물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더 걷기로. 나는 아직 걷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걷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나서기로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하면서 익숙해진 사람들과 잠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만남과 헤어짐이 자연스러운 곳이 바로 순례길이기 때문에, 아쉬움을 표하기보다 길에서 또 만나자는 인사로 대신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