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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Jun 28. 2020

첫걸음, 노란 화살표를 따라서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잠든 지 세 시간이 지났나. 눈이 팍 하고 떠졌다. 와 왜 이렇게 덥지? 어제 쌀쌀해서 패딩을 입고 침낭에 누웠는데... 침낭 안이 찜통이다. 이렇게 더울 줄은 몰랐는데 심각하다. 눈을 뜨자니 다시 못 잘 거 같고, 버티자니 더워 죽을 거 같고. 아, 이건 아니야. 패딩아... 저리 가.


 더위와 씨름하다 보니 벌써 새벽 다섯 시 반, 부스럭거리며 준비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엄청 부지런한 사람이 많구나 싶어 자세히 보니 거의 한국인이다. 머쓱한 웃음으로 눈인사를 하고 덩달아 준비를 시작했다. 아직 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어둠 속에서 준비를 하려고 하니 생각보다 쉽지 않다. 침낭도 끙끙거리면서 접고 무릎 보호대도 하고 스틱도 꺼내 들고. 드디어 준비 완료. 알베르게를 나오기 전, 방명록에 무슨 말을 남길까 하고 고민을 하다 짧게 적고 길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닿은 생장. 이제는 산티아고를 향해, 더 단단한 내가 되길 바라며"


첫걸음, with 협쓰오빠와 캘리 언니

 

 탁탁. 타탁. 잠깐씩 들리는 스틱 소리, 둔탁한 발자국 소리, 그리고 조금 신이 난 사람들의 말소리. 새벽 여섯 시 반,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와보니 이미 길을 나선 사람들이 좀 있다. 배낭을 멘 사람들도 있고 비교적 가볍게 걷는 사람들도 있다. 순례길에는 미리 배낭이나 짐을 다음 장소에 보내 놓고 가볍게 걸을 수 있는 '동키 서비스'가 있다. 컨디션에 따라 무리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내 경우에는 온전히 내 힘으로 끝까지 걷고 싶다는 다짐을 했기에 이용하지는 않을 예정이지만, 그럼에도 순례자들에게 유용한 서비스임은 틀림없다.


 쭉 길을 걷다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이 되는 갈림길이 나왔다. 어제 순례자 사무소에서 주의해야 한다는 곳이 여기는구나. 여기인가 저기인가, 여럿의 기억을 더듬어 알려준 길 쪽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이렇게 새벽에 나와서 걸어 본 적이 없는데 문득 하늘을 보니 정말 까-맣다. 근처에 가로등이 없어서 그런지 별도 정말 잘 보이고. 쏟아질듯한 별들이 너무 아름다워 계속 하늘을 보며 걸었더니 목 뒤에 뻐근함이 느껴진다. 맘 같아서는 계속 보면서 걷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한 번은 하늘을 보고 한 번은 앞을 보며 걸었다. 걷다 보니 가끔씩 들리는 말소리가 참 다양하다. 한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걸음마다 들리는 다양한 언어들이 반가워 싱글벙글 미소가 번진다. 나 정말 외국에 있구나!


자꾸 뒤돌아 보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들

 

 걷는 첫날, 하늘이 맑으면 행운이라고 했는데, 운이 흘러넘쳤다! 동이 트며 빨갛게 다시 또 보랏빛으로 변하는 하늘을 보며 걷고 있으니까. 해가 뜨고 나니 앞서간 사람들도 조금씩 보이고 뒤에 오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마을을 벗어나니 이제 오르막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올라갈수록 땀도 나고 자꾸 목도 마르고. 배낭의 무게도 슬슬 더 와 닿는다. 어제 친해진 협쓰오빠랑 주로 걷다가 잠시 숨을 고를 겸 멈춰 서서 사진 한 두장도 찍고, 다시 또 으쌰 으쌰 하면서 걷는다. 걷는 동안 날씨가 너무 좋다 보니 힘든 길도 그리 힘들지 않게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걷는 속도가 비슷하다 보니 자주 보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연스럽게 장난도 치고 같이 쉬기도 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인연이 생겼다. 광주에서 온 부부 한 팀, 23살 이제 막 제대한 학생, 2달 동안 여행 중인 언니. 젊은 부부를 보며 같이 걷는 것 자체가 예뻐 보였고 서로 챙기는 모습도 너무 보기 좋았다. 이제 막 제대를 한 친구는 순수함과 함께 패기가 느껴졌고 이미 배낭여행을 하던 언니는 내공이 단단한 느낌.


 떠나올 때만 해도 철저하게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간 건지. 걸으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부엔 까미노를 하며 응원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그걸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 개랑 같이 온 아저씨도 보고 사방에 자유롭게 풀어져 있는 말과 양들도 보고, 방울을 달고 있는 양 떼가 이동하는 것도 보고. 코를 찌르는 똥냄새도 많이 맡고. 익숙한 이 냄새에 잠깐 할머니 댁이 떠오르기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 양들, 말들 그리고 똥은 덤.


 피레네의 오르막은 아 이제 끝이겠지를 세 번이나 하고서야 순례자들을 놓아주었다. 오르막을 오를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내리막길을 내려오면서는 내 다리인데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 오죽하면 산행을 하지 않은 새 다리로 바꿔서 껴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첫날 동키 서비스는 필수라고 하는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인 걸로. 무리를 덜 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경치를 더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걸린 시간이 길었다. 한 7시간 정도 예상했는데 거의 10시간 가까이 있었으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중간에 밥도 먹고 콜라 한 잔도 하며 왔기에 걸을 수 있었으리라.


 알베르게는 언제 나오려나 하고 계속 걷다 보니 마침내 뿅 하고 나타났다. 아 드디어 끝이구나...! 홀리듯이 들어가 순례자 여권과 여권을 꺼내 침대를 배정받고 도장도 찍으니까 실감이 난다. 정말로 도착했구나. 등산화를 벗고 슬리퍼를 신고 나니까 피로도가 확 몰려온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씻고 입었던 옷들 세탁도 하고 빨래도 널고 밥도 먹어야 한다. 오 마이 가쉬, 와우, 죽겠다, 아이고 등등. 국적을 막론하고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다 똑같은 사람이구나. 삐걱거리는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고 나니 어우 소리가 절로 난다.

       

 순례길 첫 시작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물이 정말 맛있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만 해도 거의 2리터는 먹은 듯하다. 어찌나 목이 타고 땀이 나던지. 그리고 산에 갈 때나 땀을 많이 흘리는 무언가를 할 때는 물이나 과일이 최고라는 깨달음까지. 산맥을 넘으면서 냉면 생각이 아주 간절했는데 그 시원한 국물을 생각하며 돌아가면 제일 첫 번째로 먹어야지 하면서 걷고 또 걸을 수 있었다.


 오늘은 정말 날씨가 신의 한 수였다. 만약에 비가 왔다면 정말 힘든 길이었을 거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으니까.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지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걸을 수 있었기에 더 값지고 뿌듯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일은 또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떤 길이 될지 궁금하다. 고도표를 봤을 때는 내리막 길이라 조금 걱정되지만 서두르지 않고 잘 걸으면 괜찮겠지.


내일도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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