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나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간다! 하고 결정하니까 다른 의미로 잠을 못자게 됐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서 계속 생각하다보니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졌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는 없는 상태.
순례길을 걷기 위해서는 우리집의 큰 산부터 넘어야한다. 사랑하는 우리 아빠. 다 큰 딸래미 혼자 배낭 짊어지고 저기 먼나라가서 걷고 오겠다고 하면 그래 잘 다녀와라 하진 않으실텐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까. 머리가 복잡하다.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일단 저질러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빠와 단 둘이 있을 타이밍을 살살 만들기 시작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생각보다 말이 툭 나왔다.
"아빠 저 산티아고 순례길 걷고 싶어요."
딸의 말에 적잖이 당황하신 표정이다. 아빠를 설득하기 위한 말들이 나왔다. 어디에 있고 어떤 길인지 안전한지에 대해서 그동안 찾아본 것들을 설명하면서 주변 지인들의 경험담도 덧붙였다. 아빠의 표정을 보니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한마디 하실거 같기도 하다. 아빠의 입장에서 가장 큰 걱정은 '여자 혼자가기에 위험한 곳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었다. 길을 걸었던 주변의 지인들이 모두 여자였음을 설명하고, 생각보다 걷는 사람들이 많으며, 하지 말라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을거라고 했다. 그래도 안된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빠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
"그래 그렇게 가고 싶으면 조심히 다녀와"
웬걸. 이렇게 간단하다고? 원하는 답을 들었지만 어벙벙하다. 굉장히 높은 레벨의 퀘스트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깨버리다니. 뭔가 이상한데.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신발을 물으신다.
"신발은 어떻게 할거야?"
"가서 보고 사려구요."
"음, 신발은 아빠랑 가서사자."
생각하지도 못한 아빠의 사랑에 괜히 마음이 찡하다. 평소 여행은 몸쓰고 많이 보고 직접 느껴보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었기에, 걱정했던 것 보다는 흔쾌히 허락해주신 것 같다. 살아보니 하고 싶은건 해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아빠의 조언이 마음 속 깊이 스며들었다. 검은 속내가 있어 대화의 물꼬를 텄지만, 오랜만에 긴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본게 얼마만인지.
대화가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아주 큰 착각이었다. 직장 동료의 얘기도 듣고, 많은 자료를 통해 순례길을 이미 걸으신정도의 정보를 갖게 되자마자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하기 시작하셨다. 쿨한 아빠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하신다. 그래. 이게 우리 아빠지. 그러나 이미 일을 벌이고 있는 딸을 멈출 수 없다는 걸 아셨기에 '사랑의 소리'로나마 아쉬움을 대신하기로 하신 거 같다.
비행기 표는 일찍이 결제했고, 남은건 필요한 정보를 얻고 용품을 사는 일이다. 온라인으로 발가락 양말, 침낭을 주문하고, 나머지는 등산용품 아울렛과 데카트론을 방문해 직접 구매를 했다. 가방, 등산용 신발, 등산용 상하의, 물통, 큰 타월, 등산스틱, 슬리퍼, 컵라면과 비타민까지. 가장 많이 공을 들인건 신발이었다. 여러 후기를 보고 고민하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용 신발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두꺼운 등산양말을 신어야 해서 딱 맞는 사이즈 대신 발이 편안하면서도 치수가 적당히 큰 것을 고르기 위해 여러 번 신고 벗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잘몰랐는데 아울렛 몇 군데를 방문하고 여러 종류의 신발을 신어보니 발에 잘 맞는 신발을 고를 수 있었다. 평소에 신는 사이즈보다 한 사이즈를 크게 신었더니 헐떡거렸지만 발가락 양말에 등산양말까지 신는 걸 감안했을 때는 충분해 보였다. 착용법까지 숙지하고나니 느낌이 새롭다. 드디어 끝! 가자고 했는데, 다시 물으신다.
"옷은? 가방은? 모자는? 등산스틱은? "
"괜찮아요."
"됐어. 그냥 다 사."
역시 답을 바라고 물어보신 건 아니었군. 이건 예정에 없던 지출인데. 연신 괜찮다고해도 이미 들리지 않는 아빠를 보고 덜 사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죄송스러운 마음에 틱틱 말을 하니 다시 한 마디 하신다.
"뭘 고마워. 가서 별 탈 없이 잘 걷고 건강하게 돌아오면 돼."
또 마음이 찡하다. 본인 옷은 잘 사지도 않으시면서. 어엿한 성인이 되었음에도 아빠 눈에는 그저 한없이 챙겨주고 싶은 딸인가보다. 훅 들어오는 아빠의 사랑에 여러 감정이 느껴져 복잡하다. 틱틱 거렸던 모습을 반성하며 잘해야지 하고 다짐을 해본다.
리스트에 써놓았던 용품들을 다 꺼내놓고 보니까 짐이 참 많다. 본격적으로 싸볼까. 최대한 가볍게 가야 하는데, 10번을 넘게 챙겼다 풀었다해도 여전히 10kg 으로 변함이 없다. 목표는 6kg으로 정했었는데...욕심이 과했던 것 같다. 10-11월의 스페인 날씨를 보니, 경량패딩과 바람막이는 필수로 가져가야겠고, 가을과 겨울 정도의 날씨라 옷을 더 빼는 건 무리로 보인다.
"그래. 반나절 동안 짐을 쌌는데도 이 정도면 최선이야. 우선 가서 부딪혀보면 되겠지. "
순례길을 준비하다보니 각 달마다 순례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는 단체 대화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혼자라는 생각에 걱정이 돼서 방에 들어갈까 싶었지만 결국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가기도 전에 모든 걸 알고 싶지 않았고 모든 것이 새롭고 처음이고 싶었다.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설렘이 더 컸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 설렘을 안고 온전히 새롭고도 낯선 상황에 던져지고 싶었다. 말이 안통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은 없었다. 외국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이유,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몸짓 발짓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도 적당히 보고 꼭 필요한 정보나 주의할 점 정도만 숙지해놓았다.
하루 빨리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벌써 내일이라니. 가족들과 미리 인사를 했지만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면 와닿으려나. 경건하게 내일을 맞이하고 싶어서 이불 속에 누웠지만 유독 크게 콩닥거리는 심장소리가 오늘 잠은 다잤다고 말하는 것 같다. 어차피 비행기 오래 타야되니까 더 잘됐지 뭐.
드디어 떠난다.
...그런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