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어제 오셨어야 했네요."
온몸에 식은땀이 쭉 나고 머리가 핑 돌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
출발 당일, 무언가 잘못 먹은 건지 심하게 멀미를 한 탓인지 정신도 없고 온몸이 쑤셨다. 몸 상태는 엉망인데 탑승 시간은 다가오고. 비행기 타면 좀 낫겠지, 하는 생각으로 버티고 서있었다. 차례가 되어서 탑승권을 받으려고 여권을 내밀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직원의 이 한마디에 순간 머리가 띵- 하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몸에 힘이 쭉 빠졌다.
티켓에 적혀있는 시간은 8일 새벽 12시 55분. 그러나 오늘은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새벽 시간. 다시 말해서 9일 새벽 12시 55분. 무려 하루를 착각해버렸고 그렇게 나의 표는 이미 전날의 노쇼로 처리가 된 상태였다. 아... 어... 대답을 해야 하는데 말이 안 나온다.
"그러면 저희가 항공사에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이 있을까요?"
그는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나를 두고 침착하게 상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항공사 측에 따르면,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우선 예매했던 항공사에 직접 전화를 해서 처리 여부를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명함을 받아 바로 항공사에 국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은 되었지만 돌아온 답은 절망적이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한국지점에서 예매한 표는 이 쪽에서 어떤 조치도 해줄 수 없고 그쪽으로 전화를 해보라는 말뿐. 새벽시간인데 전화가 될 리가 있나. 다시 창구로 돌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다른 방법이 없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오늘이나 다른 날짜로 가는 비행기에 공석이 있다면 갈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지만 결과는 간신히 잡은 정신을 다시 흔들었다. 오늘 가는 비행기는 오버부킹에, 내일은 공휴일이라서 만석이었고, 다음날과 주말도 모두 만석인 상태. 오늘 안 오는 사람이 있다면 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린 여행인데. 어떻게 이걸 착각을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싫어서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도 위로가 되었던 것은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때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상황을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는 그를 보니, 그래 내가 저지른 실수인데 정신 차리자, 하는 생각이 들었고 덕분에 날아가버렸던 정신을 다시 붙잡아 놓을 수 있었다.
현재 할 수 있는 걸 먼저 정리해보기로 하고 보니 생각보다 간단했다. 5일 후에 출발하느냐, 다른 표를 구해서 최대한 빨리 가느냐였다.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 찰나, 출국 준비 잘하고 있냐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나름 차분하게 설명을 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목소리의 떨림을 알아챘나 보다. 같이 통화하면서 바로 파리로 가는 다른 표를 찾더니 "돈 빌려줄 테니까 제일 빠른 표 끊어서 타고 가. 천천히 줘도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무 기다렸던 여행이니까 조심히 다녀와." 친구의 말에 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나무라거나 잘 좀 확인하지 그랬어라는 등의 비난하거나 책망하는 말들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가 도울 수 있는 방법으로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나를 꺼내 주었을 뿐. 친구의 도움으로 가장 빠른 표를 알아보니 바로 아침 비행기가 있었다. 편도로 끊으니까 거의 백만 원. 대가를 지불하고 가기로 했으니 마음이 무거웠지만 눈 딱 감고 결제했다. 계속 빠르게 뛰면서 어쩔 줄 모르던 심장이 제 속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다시 살아난 기분. 동시에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각자의 방식으로 상황을 잘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준 두 사람에게 너무 고마웠다. 평소에 잘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다니.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은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이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으며 또 하나 배운다. 그들의 도움으로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을 한 번은 있을 법한 해프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부드럽게 지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무사히 아침 비행기에 안착. 참 긴 밤이었지만, 몸 상태도 회복되었고 얼굴 혈색도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국인도 많지만 외국인도 꽤 많다. 느낌이 이상하지만 익숙함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이 순간이 좋기도 하다. 메로나가 입안 가득 퍼지면서 달달한 기운까지 더해주니 금상첨화다. 상공에서 먹는 아이스크림이라니. 온갖 고생을 해서 그런지 유달리 달콤하게 느껴진다. 나, 이제 온전히 즐겨도 되겠지?
드디어... 정말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