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첫날은 걸을만했는데 둘째 날이 더 힘들었다'라고 한 후기, 딱 내 이야기이다. 아프겠거니 하고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일 줄이야. 어제의 통증이 몸에 빠짐없이 골고루 퍼지고 나니 아픔이 배가 되었다. 게다가 오늘의 코스는 내리막 길 대잔치. 발가락에 온 힘이 쏠리는 고통까지 더해지니 어디 새 발 없나... 하나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간절하다. 잠시나마 나의 고통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에 주위를 보니, 다들 무겁게 한 다리씩 옮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풉. 아 다들 비슷하구나.
그래도 다행인 건 어제에 비해 평탄한 길인 데다가 거리도 짧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의 부담이 적다. 작은 숫자이지만 체감상 굉장히 큰 4km. 덕분에 절로 생기는 여유. 중간중간 쉬는 것도 꽤 길게 쉬고, 이야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웃기도 하고. 아직까지는 꽤 순조롭다.
모두가 불과 이틀 전, 심지어 바로 어제 만난 사람들도 있는데 계속 봤던 사람들처럼 편하고 같이 걷는 게 즐겁다. 정말 신기하다.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이라 유독 크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애정인 걸까. 그게 아예 없진 않겠지만 그것이 이유가 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만난 한국인 전부와 잘 맞고 친해지는 건 아니니까. 걸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인연'이라는 단어다. 적절한 타이밍도 필요하고, 서로의 마음이 맞아야 하고, 각자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 등등. 따지고 보면 꽤나 까다롭고 은근한 조건들이 필요한데 짧은 시간 사이에 가까워진 것을 보면 그게 참 잘 맞아떨어진 듯하다. 아무래도 같이 걷고, 아프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니까 더 그런 거겠지?
혼자 걷기도 하고 노래도 들으면서 걸었다. 오래 걷다 보니 발 통증도 계속 심해지고 조금 지루하기도 해서 길을 걷는 다른 외국인 친구들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서로 대화를 하면서 걷다 보니, 그들에 대한 호기심에 힘듦이 자연스럽게 덮혀졌다. 클레어는 다리에 보호대를 차고 절뚝거리면서도 자기의 속도대로 걷고 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저렇게 까지 이 길을 굳이 걷고 있는 이유가 뭘까 하는 호기심에, 다리는 괜찮을까 하는 괜한 오지랖에 말문을 텄다. 얘기를 하다 보니, 추천을 받아 길을 걸어 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고, 가볍게 한 번 걸어 본다는 마음가짐이 너무 멋있었다. 다리는 괜찮다고 웃으며 걷는 모습을 보니 그 웃음에 덩달아 마음이 따스해졌다.
다시 걷기 시작했고 또 다른 친구와의 이야기를 통해 이 길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인 이삭과 자연스럽게 축구와 와인, 하는 일, 그리고 왜 이 길을 걷기로 한 건지 등에 대해 편하게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나의 말이 쑥 나왔다.
"나는 이게 너무 좋아. 걸으면서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이런 만남과 헤어짐이."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이 길의 매력이 그거라고 하더라 라고 한다. 직접 해보기 전까지 몰랐는데 진짜다. 그렇게 바라고 하고 싶었던 걸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더불어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오랜 내리막길을 대차게 걷고 발이 너덜너덜 해질 즈음, 소담스러운 마을 Zubiri에 드디어 도착! 걷는 양이 적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체감은 그렇지 않음을 온몸으로 소리치고 있다. 더 이상은 무리다 싶어 제발 처음 나온 알베르게에 자리가 있기를 바랐는데 너무 운이 좋게도 거의 마지막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방에 들어가 보니 이미 먼저 도착한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오늘도 수고했다며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고 씻고 빨래도 하고 나니 한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알베르게 밖으로 나와보니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적당히 높은 태양과 맑은 하늘, 바로 앞에 흐르는 물, 유럽식 다리까지. 소박하지만 아름다움이 곳곳에 묻어있는 작은 마을이랄까. 자연스럽게 물 쪽으로 관심이 갔다. 너무 좋은 날씨에 이미 몇몇 아이들은 다리를 걷어붙이고 물속에서 무언가 잡고 있었고, 가만히 보니 물이 정말 맑고 또 맑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모두 바지를 걷어올리고 물속에 발을 담갔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가재도 보이고 작은 물고기들도 중간중간 보인다. 연세가 꽤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냇가에 있는 큰 돌에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 그림이 따로 없다. 생동적이지만 이색적인 풍경에 덩달아 마음까지 평화로워졌다. 이 순간이 너무 반짝거리는 느낌. 순간의 행복을 더 오래 기억하고 싶어 눈으로, 사진으로, 손으로 느끼기로 했다.
길에서 만났던 친구인 이삭을 다시 만났는데 그 친구도 이 작은 도시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담고 있는 듯했다. 장난기가 가득한 오빠들과 함께 대화를 하다 보니 또 한바탕 함께 웃었다. 이야기를 하고, 같이 놀다가 내일 또 길에서 보자며 인사를 했다. 예쁜 마을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거기에 맥주 한 잔까지 더하고 나니 행복이 멀리 있고 거창한 게 아니구나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꺼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여유를 가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비가 엄청 오기 시작했는데, 비 오는 것조차도 좋다. 걷기 시작한 지 이제 2일 차인데 내 안에 좋은 기운들이 가득해져서 계속 하루하루가 더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발 여기저기에 물집도 잡히고 몸도 많이 쑤시긴 하지만 이 또한 어떠하리. 대가가 있기에 더 값지게 느껴지는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