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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Jul 26. 2020

잘 먹고 잘 걷기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5일 차 : Puente la Reina - Estella ( 21.7km)


 눈을 뜨자마자 생각난 건 신발이었다. 안 말랐으면 어떡하지 하고 밖으로 나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히터 바람이 나오는 곳에 신발이 예쁘게 나열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신발을 만져보니 뽀송뽀송하고 물기가 거의 다 말라 있었다. 혜니 언니랑 머리를 맞대고 과연 이 천사는 누굴까 하며 계속 추리했다. 나름의 결론은 호텔 측이겠거니 했는데 다른 외국인 신발은 그냥 있는 걸 보고 뭔가 쉽게 단정할 수 없었다.  


 우렁 각시는 협쓰 오빠였다. 새벽에 나왔다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거 보고 해 두었다고. 감동 그 자체였다. 오빠의 선행 덕분에 쉬려고 했던 슬 언니도 같이 걷기로 했다. 오늘도 비슷하게 함께 출발! 초반에는 같이 걸어가다가 점점 각자의 속도대로 걷기 시작했고, 이내 모두 흩어졌다. 신경을 발에 집중하지 않고 오늘은 또 어떤 길일까 생각하며 걸으니까 걸음이 좀 더 가볍게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 주변의 풍경을 보며 내 속도대로 걷다 보니 생각보다 걸음이 빨라졌다.  

넓은 밭들과 주렁주렁 달팽이들

 밭이 참 많다. 이렇게 크고 넓은 땅에 도대체 무얼 심는 걸까 궁금해질 정도로.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팽이들도 많다. 어찌나 많던지, 너무 많아서 되려 징그러울 정도다. 이래서 프랑스에 달팽이 요리가 유명한 건가 괜히 연결해서 생각도 해보고... 걷다가 나무 아래 모여서 뭔가 줍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멀리서부터 웃음소리가 들리길래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가서 물어보니 아몬드를 줍고 있다고 했다. 


 단단해 보이는 껍질 안에 있는 아몬드를 까서 먹어보라고 몇 개를 주었는데 웬걸. 진짜 아몬드다. 가공하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아몬드 자체로 맛이 나서 너무 신기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뭔가 알맹이로 바로 있을 것 같은 아몬드였는데. 아몬드 나무에, 알맹이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그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아몬드를 줍고, 친절하게 먹는 방법까지 알려준 사람들 덕분에 힘이 났다.

늘 반가운 노란 화살표, 짧은 휴식

  도독 도독 아몬드를 씹으면서 또다시 걸었다. 혼자 가만히 걷는 것도 괜찮구나. 온전히 내 의사로 작은 결정들을 하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멈추고 싶을 때, 쉬고 싶을 때, 가고 싶을 때 등 여러 상황에서 스스로 하는 결정들이 좋기도 하고 게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함께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랄까. 이 나름대로도 즐거웠다. 왠지 딱 앉고 싶게 생긴 바위를 보고 여기다 싶어 쉬어가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하늘도 보고 괜히 공기 냄새도 한 번 맡아보고 나니까 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했다. 


 도중에 배가 출출해져서 챙겨 온 계란이랑 귤을 꺼내 먹고 다시 힘을 냈다. 길을 걸으면서 살이 빠진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 같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잘 먹어야 잘 움직이는 편인 듯하다. 배가 고프면 영 의욕을 잃는 모습을 보니 더 명확해졌다. 가만히 걷다가 문득 지금 이 순간이 너무 값지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결국 오고 싶었던 곳에 왔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별 탈 없이 내 힘으로 잘 걷고 있다는 이 사실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호주 사람이 준 신라면, 정성과 애정 만땅 닭볶음탕

 늦은 오후가 되니 하나둘씩 알베르게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무리가 되는 거리는 아니었기에 적절하게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이모 두 분과 두 부부, 슬 언니까지 모여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해서 슬슬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호주에서 온 순례자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신라면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너무 먹고 싶은데 라면을 못 챙겨 왔다고 하니까 본인에게 있는 라면을 하나 주겠다고 했다. 충격 그 자체. 호주 사람에게 한국의 라면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유쾌하게 맵다는 시늉을 하며 신라면을 나눔 해주는 걸 보고 마음이 정말 따뜻해졌다. 


 오늘의 메뉴는 닭볶음탕. 빨간 양념이 얼마나 반갑던지. 비주얼도 맛도 정말 기가 막힐 정도였다. 타지에서 이걸 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운이 참 좋은 것 같다. 오래도록 정말 배부르게 먹었다. 먹는 내내 계속 와- 만 반복했을 정도로 너무 맛있는 한 끼였다. 매일 이 정도의 거리를 걷고 너무 잘 먹다 보니까 왠지 살이 오히려 찌는 느낌이지만, 매번 먹는 밥이 이리도 맛있는 것을 어찌하겠나. 잘 먹고 잘 걸어야지 하며 스스로를 달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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