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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Sep 06. 2020

나에 대해 알게 된 사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11일 차 : Belorado - Ages (27.4km)


 이제 날이 계속 추워지려나. 어제와 비슷하게 오늘도 춥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견딜만했는데. 이제는 패딩을 꺼내 입어야겠다. 장갑까지 꼈는데도 이가 달달 떨린다. 그래도 어제 발가락에 있는 물집들을 해결해서 발가락은 괜찮은데 이제 발등이 조금 말썽이다. 걸을 때마다 시큰거리는 게 불편해서 처음부터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했는데 한 시간 정도를 걷다 보니 조금씩 원래대로 걸어지는 것 같다. 

화창하지만 쌀쌀한 날, 힘이 되는 그들

 모두 초반이어서 조금 빠른 걸음으로 쭉쭉 걷는다. 기세를 몰아 아침 먹기 전까지 힘차게 걸어보기로 한다. 이제는 아침 먹을 시간이 되면 벌써?라는 말을 할 정도로 다들 이 생활이 익숙해지고 있다. 아침을 먹을 만한 마을을 발견해서 바에 들어갔다. 오늘은 햄과 치즈가 포옥 놓인 빵과 핫초코를 주문했다. 생각보다 초코가 꾸덕꾸덕해서 크루아상을 같이 찍어 먹었는데... 웬걸 눈이 번쩍 뜨이는 맛에 순삭 해버렸다. 하나로는 조금 부족해서 빵 하나를 더 시켜서 나누어 먹기까지 했다. 


 배를 채웠으니 다시 가야지. 점심을 먹기 위해서는 꽤 멀리 가야 하지만 그래도 먹고 나면 3km만 남으니까 힘차게 걷고 또 걷는다. 그래도 점차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느는 게 느껴진다. 발이 아프긴 해도 이제 어느 정도의 거리는 별로 숨이 차지 않으니까. 그리고 희한하게 걷다 보면 계속 걷고 싶어 진다.


 걷는 길 중에 재미있다고 느끼는 길이 있는데 특히 오르막길이 있을 때 그렇다. 작은 언덕이든 산을 오르든, 이상하게도 평지보다 생기가 도는 기분이 든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도 하고 언제 다 오르지 하다가도 막상 오르고 나서 느껴지는 그 성취감이 좋다. 덤으로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는 그 맛이란... 짜릿하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힘들긴 해도 재미있고 즐기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주욱 뻗어 있는 한적한 길들

 걷다 보니 로렌이라는 아일랜드 친구를 만났다. 어제부터 봤는데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더 기억에 남은 친구였다. 잘 모르는 사이임에도 막연히 그녀의 다리가 걱정스러워 괜찮냐고 물으며 말을 건넸다. 그녀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고모의 추천을 받아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고모가 꿀팁을 많이 알려줘서 신발도 발에 잘 맞는 경등산화를 잘 신고 올 수 있었다고. 아픈데 걷는 거 괜찮냐고 하니까 이 정도 아픔은 괜찮다고, 걸을만하다고 하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또한 자신의 상태를 알고 조급해하지 않고, 오롯이 본인 속도에 맞게 걷는 모습을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꿋꿋하게 길을 걷는 그녀를 보며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 비슷하게 힘들구나 하며 조금 힘이 나기도 했다. 


 이번엔 주서기와 걷게 되었다. 동갑이지만 멋진 이 친구는 PCT, 미국 태평양 산맥을 따라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약 4300km의 장거리 트레일을 걸은 전적을 가지고 있다. 영화 'Wild'에 나온 그 길, 감히 엄두도 못 낸 그 길을 걸었다니, 처음엔 충격 그 자체였다. 걸으며 말을 하다 보니 왜 PCT라는 길을 걸었는지, 어떤 길들을 걸었는지 등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사진으로 마주한 그곳은 눈이 쌓여 있는 산맥, 길 같지 않은 길, 아찔해 보이는 길 등 훨씬 야생적인 느낌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만의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무사히 여정을 완주했다는 점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늘 동네 산책 나온 것처럼 가볍게 길을 누비는 이 친구의 모습이 이제는 완벽하게 이해가 된다.

오늘의 먹방, 빠질 수 없는 맥주 한 잔

 많이 걸어서 그런가 계속 배를 채우게 된다. 아침, 점심, 저녁까지, 끼니를 꼭 챙기는데... 아주 먹방 그 자체다. 길을 걸으며 나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더한다면, 배고픔에 약하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도 배가 고파지면 말이 없어지고 멍해지면서 대부분의 의욕이 상실된다. 마치 바람이 푸슈욱 하고 빠져나가는 풍선처럼. 그래서 이제는 인정하고 '잘 걷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충분히 먹기로 했다. 자, 오늘도 마무리 코스,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겠다. 아무래도 오늘의 알베르게는 목소리가 큰 아저씨들로 인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이 또한 순례길의 일부임을 생각하며 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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