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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Sep 13. 2020

한 걸음씩 생각 넓히기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12일 차 : Ages - Burgos (23km)


 모두의 마음이 맞은 오늘, 에어비앤비를 하는 날이다. 그동안 대도시를 가면 꼭 다 같이 에어비앤비를 하자고 노래를 불렀는데 처음으로 10명이 한데 모이게 되었다. 그동안 매일 같이 함께 걷고, 먹고, 자며 생활했기에 이제는 가족 같은 느낌이라 지난번과는 또 다른 설렘이 있다. 숙소도 잡았겠다, 고기도 먹겠다, 가는 발걸음이 산뜻하다.


 기분과는 별개로 찌릿한 통증이 오는 발등은 이제 받아들여야 하나보다. 아픈 곳이 없으면 참 좋을 텐데 하고 욕심을 부리다가도 그래, 별 탈없이 계속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자, 이 정도의 통증에 감사해야지, 하며 위안을 삼아 본다. 그래도 어느덧 12일이 지났다고 발이 신발에 익숙해졌는지, 발바닥이 제자리를 완벽하게 찾은 것 같다. 이제 물집과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반면 10월 스페인의 날씨는 매일이 늘 새롭다. 며칠 전 추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더 그렇다. 길을 나서는 아침에는 추워서 이가 따닥따닥 부딪힌다. 걷기 시작하면서 온 몸에 제대로 에너지가 돌기까지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기 쉽기에 잘 준비해야 한다. 그래도 오늘은 나름 든든히 입는다고 긴팔 입고, 위에 또 입고, 그 위에 바람막이까지 입었는데, 손 마저 시리다. 아무래도 내일은 좀 더 껴입어야겠다.

누군가의 고맙고도 웃음이 나는 배려, 따로 또 같이.

 뒤에서 걷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흐뭇하고 괜히 든든하다. 함께 온 지난날들처럼, 묵묵히 걷고, 다시 모여 얘기도 하고. 따로 또 같이 걷는다.


 빼꼼 보이는 사람들이 유독 많은 날. 걷다 보면 이렇게 가끔 풀숲 사이에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순례길을 걷기 전, 막연히 든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생리현상 문제. 한참 걷는 중에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 근데 주변에 화장실이 없으면? 이런 생각들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막연히 어디서든 해결하면 되지 뭐,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와보니 정말 어디서든 해결이 가능하다. 적당한(?) 풀숲, 내 한 몸 가릴 만한 곳을 물색한 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가 나타나면 될 뿐. 그래서 지나가다 빼꼼 보이는 이 사람들이 참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가끔 눈이 마주친다면 민망하긴 하지만.


 모든 외국인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성큼성큼 시원스레 걷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면 아침에 일찍 나오는 건 한국인들이 제일 빠른 것 같은데 막상 걷다 보면 나올 때는 자고 있던 그들이 어느덧 앞서 있는 모습을 꽤 많이 본다. 쉬는 것도 비슷하게 쉬는 것 같은데, 공원을 돈다거나 각자 하는 운동이 생활화가 잘되어있어서 그런 건가, 나름 머리를 굴려 이유를 찾아보지만 아무래도 일단 다리가 긴 게 한몫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 왠지 괜히 억울한 느낌.

드디어 부르고스 입성...인 줄 알았지?!

 23km밖에 안 되는 길이라 쉬울 줄 알았는데 왜 더 길게 느껴지는 거지. 안개가 자욱해서 유독 길다고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으쌰 으쌰 하며 부르고스에 도착했다고 좋아했는데 웬걸, 시내까지는 5km는 더 가야 한다. 이런, 도시가 너무 커도 문제라니. 아까 도시에 들어왔는데 여전히 시내에 닿지 못했다는 소식에 한없이 내가 작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참 이상하게도 도시에 들어오면 발바닥의 통증이 배가 되는 느낌이고 힘이 더 빠진다.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모든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4시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우선 밥을 먹고 장을 보러 다녀오기로 했다. 오빠들과 친구의 배려로 휴식을 얻게 되어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곧 다시 모여 드디어 숙소에 입성. 분주히 짐을 풀고, 씻고 나오니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다. 아직 밥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기에 부르고스 성당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경이로운 부르고스 성당 조각들

 밖에서 봤을 때는 엄청 크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이야... 성당 안에 셀 수 없는 조각들과 번쩍거리는 금색의 현란함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정신이 아찔하다. 이걸 정말 사람이 만들었다고? 내딛는 걸음마다 우와, 와아 가 쉴 새 없이 나온다. 이래서 부르고스 대. 성. 당이라고 하는구나, 보니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껏 걸으며 많은 성당을 봤지만 역시 대성당이라는 이름은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그 웅장함에 종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경이로운 힘. 종교가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상상 그 이상이라는 것, 이렇게 초인적인 힘을 주기도 한다는 것.

입이 벌어지는 성당, 입맛 다셔지는 밥상

 드디어 만찬 타임! 여기 와서 몇 번 고기를 먹긴 했지만 역시 썬 오빠가 구워준 삼겹살과 목살은 항상 옳다. 오늘도 예외 없이 배가 터지도록 먹고, 빠질 수 없는 와인도 한 잔 기울인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오늘이 지나면 이 곳에서 하루 쉬어갈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 서로 흩어지게 된다. 이 좋은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마치 가족사진처럼 나란히 앉아 사진도 찍었다. 나의 까미노 가족들. 내게 있어서는 특히 새로운 경험이다. 어른들이라면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그렇지 않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 그리고 좁은 편견이었음을 알게 해 준 감사한 모두. 다양한 연령대 그리고 각자의 매력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통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참 감사하다. 아무래도 모두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자꾸 흘러가는 이 순간들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가는 시간을 잡을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건 하나, 더더더 눈에 오래 담는 방법뿐.


 처음으로 내일 걷지 않고 쉬기로 결정했다. 걸을까 하고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쉰다고 결정하고 나니까 딱 괜찮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처럼 쉰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편안하다. 비록 눈은 일찍 떠지겠지만 오늘 밤만큼은 푹 자리라. 그리고 다른 마을을 향해 걷는 것 대신 이 도시를 더 자세히 둘러봐야지. 아직은 여유로운 이 밤을 조금 더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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