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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Sep 20. 2020

쉼표, 오늘은 쉬어 갈게요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13일 차 : Burgos (0km)


 와, 쉬는 날이라니. 걷기 시작한 지 13일 만의 첫 휴식이다. 어제 쉬는 것만 믿고 거의 2시가 다 되어서 잤더니, 눈을 뜨긴 했는데 정신이 머엉하다. 아 맞다, 이모들 오늘 가신다고 했는데. 후다닥 정신을 챙기고 나간 탓에 가시기 전에 짧은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다시 자야지 하고 누웠는데 꼭 자고 싶을 때는 말똥 해지는 눈. 에잇 그냥 언니들이랑 예능이나 봐야겠다. 한참을 재밌게 보는데 이번엔 배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기가 막힌 배꼽시계 같으니... 알았어, 일어난다 일어나.


 냄비며 젓가락이며 모두 위층에 있어서 깨울 겸 올라왔는데 웬걸. 일어나서 이미 라면 끓이고 있다고 하는 멋쟁이들, 문 앞 배달까지 해준 그들 덕분에 아침이 더욱 산뜻하다. 한껏 배부르게 먹고 슬슬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눈치 보며 움직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준비하니까 정말 너~무 좋다. 아직 축축한 빨래도 드라이기로 맘껏 말릴 수 있고. 게다가 오늘 가는 알베르게도 바로 근처에 있다고 하니, 이거 정말 안 걷는 날이 맞긴 맞나 보다.

언니들과 티타임, 부르고스 대성당

 알베르게 오픈까지 시간이 남아서 바로 앞 바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사뭇 차가운 공기에 안으로 들어갈까 했지만 짐이 많아서 밖에 자리를 잡았다. 곧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이런, 오히려 비가 오니까 더 춥다. 그래도 곧 들어가니까 좀 참지 뭐, 하고 12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2시에 오픈한다고 하는 슬픈 소식... 그리고 다시 기다림의 시작.


 시간이 갈수록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오더니 바에 앉기 시작했다. 엇, 처음 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서로 하루에 걷는 거리가 비슷하기도 하고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길에서 마주쳤던 사람을 다시 도착지에서 마주할 때가 종종 있는데, 하루를 쉬니까 그동안 보지 못한 새로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싶었는데 대략 시간 계산을 해보니까 도착할 즈음이긴 하구나. 쉬는 날이라고 오전 시간이 참 순식간에 지나갔다. 언니들이랑 대화를 하면서 중간중간 그 친구들의 이야기도 들려서 귀가 쫑긋해지기도 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다 덴마크에서 온 예프라는 친구와 물집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드디어 2시, 알베르게가 열렸다. 뽀송한 상태로 들어가서 샤워도, 빨래도 안 해도 된다니!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이다. 신이 나서 나가서 구경 좀 하려고 했는데 딱 시에스타에 걸려버렸다. 혼자 가방도 다시 쌌다가 이것저것 하다 보니 훌쩍 다섯 시. 일단 나가야겠다. 다들 낮잠을 자고 있어서 혼자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비가 오긴 했지만 이 정도면 뭐 충분히 맞을만하니까. 흠,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어디로 갈까나, 모를 땐 일단 직진. 발 닫는 대로 둘러봐야겠다.

곳곳에 불켜진 상점들, 대성당 다른각도

 역시 큰 도시가 맞구나. 일단 가게들이 많고, 실제로 열려있는 곳이 꽤 많다. 오랜만에 정해진 목적지가 없이 내 발길 닫는 대로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 보니 마음이 편안하다. 또, 지나치기 아쉬운 곳은 다 들어가 보고 구경하다 보니 여행 온 기분이 들어서 더 신이 나기도 하고!


 걷는 건 좋지만 한편으로 항상 아쉬웠던 점이 시내를 맘껏 누빌만한 체력과 의욕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그동안의 한을 푸는 날이다. 물론 하루 종일 걷고 나서 하는 시내 구경도 좋지만 그때는 늘 조금이라도 덜 걷고 싶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에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쓸 에너지가 넘치기에 특히 베이커리, 옷 가게, 장신구 가게까지, 들어가고 싶은 곳은 다 들어가서 구경해야겠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맞은편에 있는 베이커리가 맛있어 보여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오잉? 아까 알베르게 앞에서 봤던 한국인이다. 괜히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빵집에 들렀다가 함께 걷게 되었다. 근쓰.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서 그런지 편하고 대화도 잘 통해서 다행이다. 얘기를 하다가 주변에 부르고스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는 말에 가려고 하다 마침 언니 오빠들한테 연락이 와서 다 같이 가기로 했다.

붉은 지붕이 많은 부르고스 시내 풍경

 딱 전망대가 문을 닫을 즈음 기가 막히게 세이프. 비가 와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한국의 낙산공원이나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한눈에 보는 느낌이 나서 좋았다. 기념품 가게에서 패치도 사서 가방에 달고 혜니 언니가 사준 배지도 다니까 가방이 한껏 멋스러워졌다.


 하루 동안 휴식 시간을 가져보니, 잘 쉬는 것도 걷는 것만큼 참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온전한 하루의 휴식을 통해 내일,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힘내서 걸어야지 하는 다짐을 더 견고히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주변을 찬찬히 볼 수 있는 여유로부터 오는 행복감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도 휴식의 진정한 힘은 잠시 쉬어가는 게 전부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한다는 점을 느끼게 되는 날이다. 이 마음으로 내일도 힘차게 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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