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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Sep 27. 2020

그때 비로소 보일 거야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14일 차 : Burgos - Hontanas (31km)


 달콤했던 휴식은 꿈이었나, 눈 떠보니 다시 현실 시작. 그래도 하루를 쉬었더니 발 상태도 좋고, 딱 붙어있던 다크서클 색도 연해졌다. 아침을 출발하기 전에 먹고 가기로 해서 1층에 모였다. 준비해두었던 과일과 빵을 야무지게 먹고, 밤사이의 안부를 주고받다 보니 7시 반이 조금 넘는 시간. 읏차, 가즈아!


 어제 만난 근쓰까지 총 일곱 명이서 함께 걷게 되었다. 발걸음이 가벼워 속도를 내서 걷다 보니 혼자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러다 보니 근쓰와 걷는 속도가 맞아 대화를 하고, 장난도 치면서 친해졌다. 그는 회사를 1년 8개월 정도 다니다가 퇴사를 하고 여행을 왔다고 했다. 그리고 친한 지인의 추천을 받아 순례길을 온 경우였다. 막상 걸어보니 어떻냐고 하니까 추천해준 형한테 해줄 말이 아주 많다며 이를 갈며 말을 하다가도, 고생길이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오지 못할 것 같은 길이기에 오길 잘했다고 했다.

길고 긴 평지 길

 내 경우에는 순례길을 걷는 동안 계속 사람들과 함께였는데, 오빠는 그동안 거의 혼자 걸어왔다고 했다. 혼자 걸을 때는 아침도 잘 안 먹고 주로 걷기만 해서 돈 쓸 일이 없었다고. 비교해보니 정말 반이 넘게 차이가 날 정도로 차이가 나긴 했다. 혼자라서 편한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심심하고 더 힘들기도 하다고 하기도 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더욱 그렇다고. 혼자 31km를 걸었다면 못 걸었을 텐데 같이 장난치고 이야기하면서 오니까 걸을만하다고.


 맞다. 이렇게 긴 거리의 길을 혼자 걸었다면... 글쎄, 걸을 수는 있었어도 실제 거리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중간에 멈췄을 수도 있고. 아마 지금보다 두 배는 힘든 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혼자서도 좋지만 같이 걸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또 다른 행운이니까.


 당분간 걷는 길에 평지가 많다고 했는데 과연 소문대로다. 잠깐의 오르막이 있었을 뿐 대부분이 평지라 꽤나 지루하다. 그래도 말동무가 있어서, 발이 제법 잘 버텨주어서 다행이다. 분명히 이제 마을이 나와야 하는데 31km가 다 되도록 마을의 흔적도 안 보인다. 어디 있... 어?! 정말 갑자기 슝! 나타났다. 몇 명은 신이 나서 뛰다시피 마을로 들어갔던 것 같다. 정말 어떤 블로그의 설명이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하다. '전혀 없을 것 같은데 갑자기 마을이 나타나요.'

뿅 나타난 마을. 너, 듣던대로구나?!

 마을에 도착했는데 다리가 너무 멀쩡하다. 마을도 아기자기 하니 예쁘기도 해서 씻고 구경해야지. 우선 알베르게에 짐부터 내려놓고 동키 보낸 언니네 짐을 찾아오려고 했는데... 짐이 없다. 벌써 도착해있어야 할 배낭이 없다. 이곳저곳을 살펴도 없길래 언니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비상사태. 일단 다른 곳에 갔을 확률이 있다고 해서 몇 명은 다른 바에 가보고, 언니는 알베르게에 있던 종업원에게 동키 회사에 전화를 부탁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상황을 알고 보니 누군가 봉투에 넣어둔 돈 동키 값, 5유로만 쏙 빼서 가져간 탓에 짐을 두고 온 바에 그대로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가방이 무사히 잘 있다는 것에 안도를 하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국 50유로의 왕복 택시비를 내고 가방을 가지고 오기로 했다.


 돈이 좀 들긴 했지만 가방이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다. 동키를 하면 좋긴 한데 이런 경우를 볼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원래도 동키 서비스를 이용할 생각이 없긴 했지만 이럴 때마다 그래 무거워도 들고 가야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는 것 같다.


 내일은 28km를 갈지 35km를 갈지 고민이다. 그래도 오늘 많이 걸은 만큼 너무 큰 무리는 안 해야지 싶다. 시원한 맥주 한 잔 하며, 이 밤을 조금 즐기다가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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