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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Nov 01. 2020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17일 차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27km)


 잠을 좀 설쳤다. 다리가 저릿해서인지 코골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눈이 떠졌다. 뒤척거리다 보니 어느새 6시 반, 귀신같은 생체 시계 덕분에 몸을 일으켰다. 찌뿌둥한 몸을 풀어볼까 싶어 발목도 돌려보고 굳은 몸을 쭉쭉 펴는데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잠까지 설쳤는데 묘하게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오늘은 출발이 좀 늦긴 했네. 다들 잘 잤지?"

 "어쩐지, 서머타임 끝났구나" 


 분명히 출발시간은 비슷한데 왜 출발이 늦었다고 하는 걸까 했는데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처음 듣는 서머타임(Summer time)이 뭔가 했더니, 유럽에서는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까지 평소보다 한 시간이 빨라지는데 이를 가리켜 서머타임이라고 한다. 고로 오늘부터는 서머타임이 끝났으므로 평소보다 한 시간을 더 잔 셈이었다. 역시 개운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평소와 같이 일어나 준비를 했고 단지 시간만 바뀌었을 뿐인데 왠지 오늘 하루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17km의 늪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침을 길 위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계속 걸었다. 이 정도 걸었으면 의자 하나쯤은 나와야 하는데, 여전히 눈앞에 펼쳐진 건 변함없는 길 뿐.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지 먹고 갈까 하는 말에 바로 가방을 내려놓을만한 곳을 물색했다. 어차피 앉을 곳은 없으니 대충 길 옆에 가방을 놓고 준비해온 사과와 계란과 빵을 꺼냈다.


 아침을 먹으며 보는 풍경이 걸어가는 순례자들이라니 느낌이 색다르다. 한 손에는 사과, 다른 손에는 빵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릴 보고 웃으며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보며 힘차게 건네는 올라(Hola)를 더하니 한껏 식사가 즐거워졌다. 짧지만 강렬했던 아침을 뒤로한 채 다시 출발을 했는데 이런, 앉을 만한 곳이 보였다. 그래도 이색적인 풍경에서 잘 먹었으니 패스.

단비 같은 바, 누군가의 따스한 마음

 장장 17km를 걸었더니 드디어 저 멀리서 바(Bar)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쉬기도 하고 구경도 할 겸 가게로 바로 직행. 이 곳에서 점심을 먹을지 좀 더 갈지 고민을 했지만 윤기가 좌르르 한 음식을 보고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각각 먹고 싶은 메뉴로 오믈렛, 라자냐, 볼로네제를 시켰는데 다들 눈이 띠용. 우리의 판단은 훌륭했다. 보기에도 침샘을 자극했는데, 무심한 듯 퍼주는 양까지 어마어마했다. 먹는 동안 그간 먹었던 음식 중에서 제일 혜자스러운 곳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오렌지 주스 어찌나 맛있던지. 생오렌지를 갈았는데도 달달해서 계속 입에서 당기는 맛이랄까. 그래서 잘 먹지도 않는 음료를 2잔이나 해치웠다.


 다시 신발끈을 묶고 쑥 언니랑 남은 거리를 2시간 반 컷으로 끊어보자며 호기롭게 출발했다. 한참을 걷다 발견한 의자에서 잠시 쉬어갈까 했는데 주서기가 오고 있다는 소식에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원래 쉬려고 했던 시간의 절반만 쉬고 바로 출발. 우리가 출발했던 곳보다 훨씬 떨어진 마을에서 출발했는데 벌써 근처까지 왔다는 말에 같은 사람이 맞나 하는 의문도 잠시, 이렇게 걷다가 길 위에서 마주치면... 의욕이 저 끝까지 떨어질 것 같았다.

드넓게 펼쳐진 길, 빛과 하늘따라 달라지는 길

 이것만큼은 안 되겠다며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걸었다. 정말 마의 구간 3km였다. 일부러 쫓아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만의 레이스는 이미 시작되었고 멈출 수 없었다. 함께 걸었던 근쓰도 알베르게 앞에 도착하니 마치 작동을 멈추는 로봇처럼 삐그덕거렸다. 비록 다리가 당기고 뻐근했지만 그래도 길 위에서 마주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참, 이게 뭐라고 이리도 뿌듯한지.


 씻고 빨래를 널고 나니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9명 이서만 쓰는 숙소여서 그런지 작은 에어비앤비 같은 느낌이 났다. 마치 엠티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맥주 한 잔의 기분 좋은 알딸딸함이 순간 속으로 더욱 스며들도록 도와주었다.


 잘 걷고, 잘 먹고, 잘 자고. 그 어느 때보다도 단순한 지금의 일상이 너무 좋고 행복하다. 복잡하지 않은 일상 속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삶의 진리들이 있는 걸까.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이 순간들을 있는 힘껏 소중히 모아 오래도록 꺼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오랜만에 본 주서기도 반가웠고. 이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가는 게 아쉬워서 잠들고 싶지 않지만 오늘도 열 시가 되면 거의 기절할 것 같다. 가는 밤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내일을 위해 이만 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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