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18일 차 : Moratinos - El Burgo Ranero (27.35km)
어제의 후유증으로 밤동안 오른쪽 다리가 당겼는데 아침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졌다.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내 속도대로 걸으리라 다짐하며,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눕자마자 잠들었더니 몸도 개운하고, 날씨도 화창하니 기분도 좋다. 초반부터 흥 폭발. 자체 BGM은 물론, 춤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많이 부족한 율동(?)도 더해졌다.
몸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사뿐사뿐, 오늘은 아침 먹는 곳이 가까웠다. 후딱 빵이랑 따뜻한 커피 한 잔 하고 걸으려고 했는데... 아이고, 아무래도 일찍 나가는 건 글렀다. 오믈렛도 안 만들어져 있고, 주인아저씨는 하나 시키면 주문받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래, 좀 쉬었다 가지 뭐 하며 기다렸지만 기다림 끝에 먹은 또르띠야는 무지하게 짰다! 게다가 크루아상에서는 누린 맛이 난다길래 에이 설마 했는데 정말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었다. 우리는 분명 아침을 먹었는데 여전히 배가 고팠다.
"점심만 기다린다..."
많은 순례자들에게 지루한 길로 여겨지는 이 곳, 메세타 평원길이 점프를 많이 하는 구간이라는 말을 오늘에서야 실감했다. 가을 나뭇잎을 안고 있는 나무들, 광활하게 뻗어있는 길, 탁 트인 시야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감탄의 연속이었지만, 계속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 평지길은 지루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만큼은 평온했고 숨이 트이는 느낌까지 더러 들기도 했다. 좋은 경치를 보며 단순히 걷다 보니 어지러웠던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왠지 적당히 뜨거운 햇살과 모든 근심 걱정을 품어줄 것만 같은 하늘이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한없이 맑은 날씨를 담고 싶어 잊고 지냈던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잠시 버벅거리다가 일단 한 번 눌렀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어 아낌없이 셔터를 눌렀다. 부디 초점만은 맞았길 바라면서.
걷다가 지칠 즈음 점심을 해결할만한 마을에 도착했다. 아침은 호되게 당했지만 점심은 성공적이었다. 6.85유로에 감자튀김, 계란 2개, 고기 조금, 시원한 콜라 한 잔까지 해결. 오늘부터 조금 덜 먹어볼까 했지만 그 마음은 고이 넣어두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먹는 건 참 즐거우니까. 결국 순례길이 끝나는 그 날까지 양껏 먹기로 했다.
역시나 맛있게 먹었더니 다시 힘이 났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더 걷고 나니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바로 앞에 슈퍼도 있어서 장도 편하게 보고, 요리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오늘의 저녁이 한껏 멋스러워졌다. 정성스러운 식사에 와인까지 한 상을 차려놓고 보니 완벽 그 자체.
이 곳에 온 뒤로 잘 먹지 않았던 초콜릿, 젤리, 아이스크림까지 엄청 당기는 이상한 식욕이 생겼다. 그래서 매일같이 마켓을 갈 때마다 초콜릿 쿠키를 샀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매우 놀라운 부분이었다.
그렇게 걱정했던 베드 버그만큼은 피해 가고 싶었는데 손에서 찜찜한 자국이 발견되었다. 간지러움보다는 강제 금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괴롭지만 레온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참아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