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20일 차 : Mansilla de las mulas - Leon (18.56km)
오랜만에 대도시에 입성하는 날이라 요 며칠 중 발걸음이 가장 가볍다. 비록 날씨는 흐리고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고 있지만 서로 으쌰 으쌰 하며 걸으니 텐션도 조금씩 올라왔다. 게다가 팜플로나, 부르고스에 이어 마지막으로 함께 머무르는 큰 도시인만큼 한껏 올라간 기대도 두둑이 한몫하는 듯하다.
대도시에 갈 때마다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예약하다 보니 이제는 에어비앤비가 마치 대도시 입성 기념 의식처럼 자리 잡아 오늘도 예외 없이 신나게 회포를 풀기로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동안과 다른 특별한 점이 있는데, 오고 가며 친해진 친구들을 숙소로 초대해서 함께 보낸다는 것이 조금 달랐다. 사실 넓게 보면 평소와 다름없이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지만,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라는 점이 유독 특별하게 다가왔다.
레온까지 거리가 18km 정도라 짧게 쉬고 부지런히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 레온에 도착은 했는데 멈췄던 비가 다시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어째 대도시에 올 때마다 늘 비로 환영을 받는지, 오늘도 어김없이 비가 오는구나. 그렇지만 뭐 이 정도라면 할만하지. 듬성듬성 내리는 비가 오랜만에 하는 별천지 구경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외딴 시골에서 마침내 도시로 상경한 아이처럼 쉴 새 없이 고개가 돌아갔다. 사람 구경하랴, 가게 구경하랴, 두 눈이 하염없이 반짝거렸다. 레깅스나 편한 옷만 입고 다니다가 오랜만에 다양한 스타일의 옷들을 보니 즐거움이 배가 되기도 했다.
시내 구경을 하다 보니 가우디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카사 보티네스(Casa Botines)라는 이름의 건축물이 있었다. 그의 대표작들이 워낙 섬세하고, 웅장하면서도 독보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그런 건축물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평범해서 큰 감흥이 오진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건축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거리를 따라 쭉 올라가 레온 성당도 보고, 짧은 구경을 마친 후 잠시나마 편하게 쉬기 위해 바깥에 자리가 있는 바에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늦은 점심도 먹고 장도 보고 나니 어느덧 숙소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깔끔하고 넓은 공간의 숙소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근데 분명 베드가 더 있다고 했는데 어디 있는 거지 싶어 둘러보니, 웬걸 거실에 있던 소파가 침대로 슝 변신이 가능했다. 침대가 없다면 바닥에 이불을 깔아서 잠자리를 만드는 게 익숙한 토종 한국인에게는 볼 때마다 새로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침대 수를 세는 방식이다. 침대방에서 아늑한 밤을 보낼 두 사람을 뽑기 위해 오랜만에 종이를 펼쳐 사다리를 그렸다. 자체 BGM까지 더해져 잔뜩 신이 났다. 아, 어쩐지 트랜스 포머 소파에 눈이 가더라니, 나와 쑥 언니의 차지가 되었다.
방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전까지 약간의 시간이 생겼다. 잠시나마 레온의 밤거리를 느끼고 싶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도 가질 겸 다시 밖으로 나왔다. 한 번 왔던 길이니까 충분히 다시 찾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일단 걸었다. 혼자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를 거닐다 보니 낮과는 다른 느낌. 적당한 어둠에, 적당히 오고 가는 사람들, 낮처럼 밝진 않지만 은은하게 아늑한 느낌마저 주는 밤공기가 좋았다. 아까 봤던 레온 성당도 한 번 더 보고,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산책을 즐기다 눈에 밟혔던 감자칩을 품에 앉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 문을 열기도 전에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열린 문과 함께 온 감각에 파고드는 향긋한 찌개 향이 아주 아찔했다. 무적의 부대찌개, 냄비 3개에 쑥 언니의 양념 파워로 환상의 저녁을 만끽했다. 1차 먹방이 끝나고 자연스레 2차 먹방으로 과자 안주와 술로 이어졌다.
오늘도 끊임없는 먹방의 현장에서 하이라이트는 단연 술 게임이었다. 한국, 대만, 홍콩인이 모여서 하는 술 게임이라니. 무슨 게임을 할까 하다가 영어로 초성게임, 손병호 게임, 망고 게임, 딸기 게임까지 다양하게 나왔다. 어디에서 해보지 않은 술 게임인지라 이게 재미있으려나 하고 걱정했지만 정말 괜한 걱정이었다. 침묵의 공공칠까지 하면서 배꼽이 빠질 것처럼, 방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강링은 술도 정말 잘 마시고 매운 음식도 정말 잘 먹어서 신기했다. 반면 에이미는 정반대로 술을 못하고 매운 것도 잘 못 먹지만 그 누구보다도 함께 어울려서 잘 놀았다. 자기 전, 에이미와 짧은 대화를 나누다 처음에 생장에 도착했을 때 봤는데 친해지고 싶었다고, 이런 기회가 생겨서 너무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같이 놀면서 친해질 수 있다니, 술 게임의 순기능을 오랜만에 느꼈다. 한편으로는 정말 신기하기도 했다. 국적, 나이 상관없이 어울려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게 좋았고, 타지에서 마음이 맞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다.
이제 더 가까워졌는데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니, 매우 아쉬웠다. 비록 당분간 두 친구와는 한동안 볼 수 없겠지만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 날이 있겠지 싶어서 너무 슬프게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리, 잠시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