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23일 차 : El Ganso - El Acebo (24km)
아직 어둠이 내려앉은 이층, 조금씩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다 겨우 침낭을 벗어나 배낭을 들고 내려갔다. 첫 번째로 일어난 줄 알았는데 이미 갈 준비를 마친 조르디가 있었다. 잘 잤냐는 말에 반쯤 뜬 눈으로 인사를 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부엔 까미노."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오늘도 출발. 거리는 24km, 앞서 간 주서기의 코멘트 '오르막길이 있지만 충분히 걸을 만한 코스'를 종합해보면 난이도는 중 정도 될 것 같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오르막길 소식에 반가움과 길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걷는 길 중 가장 재미있다고 느끼는 길을 뽑자면 단연 오르막 길이다. 평지는 여유롭게 걸을 수 있고 조금씩 바뀌는 풍경을 보면서 걸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재미를 느끼긴 어렵다.
반면 오르막길은 경사가 있어서 숨이 차오르지만 오르는 그 순간에 집중하고 거기에 빠져 든다. 그리고 그때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데 그게 참 좋다. 올라가는 게 힘이 들어도 흐르는 땀과, 스트레스를 함께 날려 보내는 같아서 상쾌하고, 그 뒤에 느껴지는 성취감이 짜릿해서 즐겁다. 실과 바늘처럼, 오르막이 있으면 언제나 내리막도 있기 마련이지만 오르는 즐거움에 비해 내려가는 건 재미가 없다.
'유독 오르막길을 재미있다고 느끼는 이유가 뭘까.'
왜 좋다고 느꼈는지 찬찬히 되짚어 보니 나의 성격이 잘 드러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달려가며 재미를 느끼는 내게 오르막길은, 이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작은 목표'였다. 목표를 정하고, 달성해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오르막길을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좀 더 속도를 내볼까 하는 찰나에 그냥 뚝 하고 오르막길이 끝났고, 아스팔트 길이 다시 나타났다. 달콤한 사탕을 입에 넣자마자 뺏긴 느낌. 어중간한 길에 괜한 실망감이 피어올랐다. 게다가 잦은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무릎이 지끈거렸다. 그러다 보니 마치 30km를 걷고 난 것처럼 피로감까지 느껴졌다. 산티아고에 일찍 도착하는 몇 명에게만 특별한 조식이 제공된다는 소식을 듣고 일찍 가볼까 고민했지만, 더 이상 무리를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바로 접었다.
애매한 시간에 먹은 한 끼는 지금껏 먹었던 아침 겸 점심 중 유일하게 맛과 분위기 모두 훌륭했다. 바게트 빵 위에 탱글탱글한 반숙과, 부드럽고 짭조름한 하몽이 이불처럼 덮인 메뉴를 먹었는데 입에서 살살 녹았다. 금방 자취를 감춘 게 아쉬웠지만 한국에서 충분히 해 먹을 수 있는 메뉴라는 생각이 들어서 위로가 됐다.
배를 채우고 나오니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이내 '철의 십자가'에 도착했다. 순례자들이 메시지를 적은 돌이나 물건을 지닌 채 길을 걷다가 모든 걱정을 담아 두고 오는 장소로 알려진 곳이었다.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돌이, 사진이, 물건들이 철의 십자가를 감싸고 있었다. 비록 들고 온 돌은 없었지만 나의 근심도 이 곳에 두면서 바랐다. 이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내리막길에서 한계를 보인 다리가 그래도 잘 버텨주어서 다행이다. El Acebo라고 적혀있는 안내판을 보고 어찌나 반갑던지. 공립 알베르게를 갈까 싶었지만, 몸이 고되니 10유로를 내고 더 편하게 머무르자 싶어 콘도 같은 곳을 왔는데 굉장히 좋은 선택이었다. 방은 따뜻하고 순례자 메뉴는 푸짐했다. 오르막길은 아쉬웠지만 끼니마다 훌륭했던 음식들이 아쉬움을 채워주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