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22일 차 : Hospital de Órbigo - El ganso (28.56km)
알베르게를 나왔을 때 하늘이 파랗고 맑은지 아니면 회색 빛의 구름 덩이들이 가득한 지에 따라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이 다르다. 씻을 때부터 그치길 바랐건만 여전히 보이는 건 먹구름이요 맞아주는 건 토독토독 내리는 빗소리뿐. 그래도 빗방울이 그리 굵지 않고 하늘도 연한 회색 빛이라 다행이다.
걸을 때 최대한 비가 안 오는 게 좋지만 가끔씩 적당히 내리는 비는 반가울 때가 있다. 떨어지는 빗소리와 특유의 착 가라앉는 듯한 고요한 분위기가 좋은데 그런 날은 유독 내 속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날이 되기도 한다.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엉켜 있던 생각들을 객관적으로 마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날이랄까. 그래서인지 한 번씩 비와 함께 찾아드는 그 센티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동안 길을 걸으면서 정말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유독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이 평소보다 두 배는 무겁게 느껴졌고, 다리까지 피로감이 느껴져 얼마 걷지 않았음에도 계속 걸었다 섰다를 반복했다. 아니, 뭘 했다고 힘들지. 지친 몸 때문에 마음도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부정이 가득 찼다.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납득할 수가 없어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가, 힘들 수도 있지 하는 양 쪽 마음들의 분열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남은 길을 이렇게 걸을 순 없었고, 이내 그래 힘이 들 수 있지 하고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도 맑아졌다.
'그래, 어차피 가야 할 거 웃으면서 가자.'
길 위에서는 자주, 불쑥 민낯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게. 예기치 못한 순간들 속에서 나의 성격, 태도,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온다. 그러다 보면 그중에는 이미 익숙한 것도 있고, 부정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 이런 점이 있었나 하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어떤 모습이든 그리고 좋든 싫든 결국 전부 나의 일부이기에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 길은 조금씩 천천히 진짜 나를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떠나기 전, 무조건 가야겠다는 마음을 따른 것이었지만 800km를 걷는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었다. 8km를 걷는 것도 힘든데 과연 그 백 배를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싶다는 마음을 따라가도 되는 걸까,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여러 생각들이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순례길을 걷는다는 것은 막연한 두려움들에 맞서 보는 것이었다. 저울질이 계속되었지만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바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길 위에 오른 지금, 매일 여섯 시간 넘게 10kg의 배낭을 메고 걸으며 힘들 때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정에 오른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어떤 날들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도착하는 그 날까지 이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온 힘을 끌어 모아 기합을 넣고 걸었더니 마지막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힘겹게 온만큼 작은 이 마을이 너무나 반갑다. 비가 언제 왔냐는 듯 완전히 갠 하늘까지 따뜻하게 맞아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도착한 알베르게는 조용하고 아늑하니 마치 영화 호빗 마을에 잠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문득 어제의 악몽이 떠올라 함께 방을 쓰는 순례자에게 따뜻한 물이 나오냐고 물었더니 엄청 잘 나온다고 해서 안심이 되었다. 조르디라는 친구가 먼저 말을 걸어서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아시아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그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더 신이나 보였다.
씻는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조르디와 좀 더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살면서 스쿠버다이빙을 한다고 해서 엄청 신기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철인 3종 경기도 한다고 해서 더 충격적이었다.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의 얼굴은 이렇구나'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밝은 기운은 옆에 있는 사람까지 밝아지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저 힘들었다로 마무리될 뻔했지만 하루의 끝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 또 하나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