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19일 차 : El Burgo Ranero - Mansilla de las mulas (19km)
첫 마을이 12km 지점에 있어서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삶은 계란, 사과, 하트 모양의 엄마 손 파이 같은 과자까지 취향껏 골라 먹을 수 있는 아침식사가 준비되었다.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밤새 긁기 바빴던 베드 버그 흔적은 아침이 되고 나니 좀 잠잠해졌다. 약을 먹으려다가 밤에 먹고 자는 게 효과가 좋다는 말에 저녁에 먹기로 했다. 기억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근쓰와는 속도가 맞았다. 따각따각. 그와 같이 걷다 보면 들리는 또 다른 소리가 있는데, 바로 스틱 소리다. 워낙 스틱을 잘 활용하는 탓에 다리가 네 개라고 할 정도로, 이제는 마치 그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걸음 소리와 하모니를 이루는 스틱 소리가 경쾌했다. 문득 그가 왜 이 길을 걷는지 궁금해졌다.
"오빠, 왜 걸어?"
"음, 글쎄. 근데 이게 처음으로 내가 걷고자 한 길이었고, 유일하게 내 의지로 한 선택이었어."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다 그저 담백하게 내어 놓은 말이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그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오히려 묵직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고 대학도 갔고. 졸업하고는 취직해야지 해서 바로 취직도 했고. 근데 생각해보니까 그건 내 의지보다는 해야 하니까, 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했던 것들이었어. 근데 순례길은, 음... 주변 사람들이 말렸는데도 그냥 다녀오겠다고 하고 온 거야. 처음으로."
이 곳에 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들을 안고 있었을까. 잠시 생각해봤을 뿐인데 내 마음이 덩달아 무거워졌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수 있는 용기, 부정의 눈초리를 무시할 수 있는 당당함이 값지게 느껴졌다.
'왜 이 길을 걷는가.'
피레네 산맥을 넘고, 드넓게 펼쳐진 평원을 걸으면서 내게도 했던 질문이었다. 여러 이유들이 맴돌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했다. 결국 불편함만 가득한 채 모르겠다로 정리하곤 했다. 누군가에게 설명을 해야 되는 게 아니었음에도 명확히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 있어 보이는, 내 행동이 맞다고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 그럴싸한 대답을 찾고자 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뽀얗게 쌓인 먼지들을 닦아내고 나니 그 안의 내용물이 그제야 또렷하게 보였다. 별 볼일 없지만 제일 솔직하고 단순한, 그저 미치도록 오고 싶은 마음을 따랐을 뿐이었다.
순례길 여정의 중반에 이르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생각이 단순해졌다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들만 생각을 한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잘지, 얼마나 걸을지. 그러다 보니 자질구레한 걱정과 고민들로 머리 아플 일이 없다. 또한 매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고, 웃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좋은 에너지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더욱 순례길이 끝나는 날에 어떤 느낌이 들지 기대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셰프는 주서기. 파스타를 잘한다는 말에 그의 솜씨로 식탁이 채워졌다. 넉넉한 양의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가 순식간에 뚝딱뚝딱 만들어졌다. 미리 준비해 놓은 빵과 샐러드,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샹그리아와 콜라까지 더해져, 오늘도 배부르고 행복한 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