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25일 차 : Cacabelos - Vega de Valcarce(25.34km)
이제는 날씨가 좋을 거라는 기대를 하기보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비가 오길 바라며 길을 떠난다. 11월이 되면서 스페인에도 겨울이 다가왔고, 비가 오는 날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느덧 비 내리는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요령이 늘고 있다. 비가 내릴 때, 가방에 레인커버를 씌우는 것도 어색했던 때와 다르게 한 번에 씌우고, 우비도 꺼내기 편한 위치에 놓아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도록 놓아두면서 나름의 스킬을 쌓아가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 그리고 생활의 패턴은 걷기에 더 맞춰졌다.
출발하기 전,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30km를 넘게 걸은 날이라 밤에 충분히 스트레칭을 해주었어야 했는데 부족했던 것 같다. 한동안 여기저기 몸을 풀어주니 이제 걸어도 괜찮을만한 상태가 되었다. 생각보다 금방 마을이 나왔지만, 간신히 끌어올린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아 다음 마을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어플에 나와있는 대로 4km 정도 떨어진 마을에서 쉬려고 했는데, 웬걸, 막상 도착하고 보니 유령마을이었다. 텅 빈 마을에 쉬어갈 곳은 없었다. 배가 고팠지만 비가 계속 오는 바람에,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더 걸어서 다른 마을에 가는 것. 어쩔 수 없이 더 걸었고, 몇 키로를 더 걸어서 드디어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바로 보이는 바에 홀린 듯 들어가서 머핀과 음료 한 잔을 시켜서 먹으니 이 곳까지 걸은 보람이 있었다. 축축한 우비에서 벗어나, 달달한 머핀에 시원한 음료 한 잔 까지 하니까 보상을 받은 느낌이었다.
비야 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매일 재방송으로 돌려 보던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 촬영지에 있다고 생각하니 낯설었지만, 많이 봐서 그런지 익숙하기도 했다. 자주 봐서 어떻게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지도 눈에 선했다. 길을 따라 마을 안 쪽으로 들어가면서 설레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만끽하며 둘러보니, 왜 이 마을에서 촬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적당한 크기에 안락한 느낌을 주는 마을이었고, 더불어 잘 정돈된 느낌이 드는 마을이었다. 필요한 것들도, 웬만한 건 모두 구할 수 있는 가게들도 적당히 있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활발한 마을이었다. 사람들 간의 왕래가 많다 보니, 마을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지나온 도시들과 비교했을 때, 유명한 대도시를 제외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건 거의 처음이었다.
온 김에 촬영을 했던 알베르게도 들러봐야지 싶어서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너무 휑했다. 그럴듯하게 남아 있는 입구를 지나 기대를 안고 들어갔지만, 촬영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이 곳에서 촬영을 했던 게 맞나 할 정도로 남아 있는 흔적은 거의 없어서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안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거의 평지에 아스팔트 길을 걸어서 개인적으로 제일 선호하지 않는 길이다. 게다가 조금씩 계속 내리는 비까지 더해져 더 떨떠름하다. 하늘에 먹구름이 있는 걸 보아하니 종일 비가 내렸다가 말았다가 할 것 같은 날씨지만, 그래도 구멍 뚫린 것처럼 쏟아지진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
한참 걷다가 나온 바(bar)에서 여유롭게 쉬고, 남은 7km를 향해 다시 걸었다. 생각보다 굵은 빗줄기에 신발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신발만은 젖게 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빠르게 걸었더니, 금방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아졌다. 맑게 갠 날씨를 보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반갑게 맞아주는 주인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시트를 깔고 짐도 풀었다. 여유롭게 씻고 빨래까지 했는데도 아직 4시. 알베르게에만 머무르기엔 아쉬운 시간이라, 근처에 있는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작은 마을이라 충분히 다 둘러볼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괜히 더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내일을 위해 알베르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