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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Jan 10. 2021

주저앉고 싶은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26일 차 : Vega de Valcrarce - Fonfria (25km)


 안녕, 비야. 이제는 너를 보는 일이 당연해졌구나. 매일 꼬박꼬박 출석 체크를 하는 비 덕분에, 가방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판초를 입는 일이 필수가 되었다. 가만히 하늘을 보니, 먹구름을 한껏 거느리고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 싸하다. 온종일 비가 올 것 같다.


 익숙했던 지역인 레온(Leon)을 떠나 새로운 갈리시아(Galicia)로 진입하는 날이자, 1300m의 고지까지 오르막의 향연이 펼쳐지는 날이건만, 자비 없이 비가 쏟아진다. 더불어 세찬 바람까지. 사방으로 거의 때려 맞다시피 오는 비 때문에 정신을 차릴 틈이 없다.

비 내리는 숲길, 나름의 매력

 오르막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오늘 같은 날은 평지가 새삼 그립다. 무자비하게 내리는 비에 속도는 계속 느려졌고, 기분까지 내려앉았다. 멍한 상태로 걸은 지 한 시간 반, 드디어 바(Bar)가 나타났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걸려 있던 다른 순례자들의 판초였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판초들을 보니 괜히 동질감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가게의 내부가 그리 따뜻한 편은 아니었지만, 축축한 판초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이유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오렌지 주스도 마시고, 배도 채우며 휴식을 취하고 나니, 다시 길을 나설 힘이 생겼다.

피로가 잊혀지는 풍경, 어서오세요 여기부터는 갈리시아입니다

 짜잔,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보이는 오르막길. 체념한 채로 묵묵히 아래를 보며 걸었다. 그러다 무심코 옆을 봤는데 웬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과 함께 어우러진 산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광활한 풍경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게 빛나는 자연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길 위에서의 선물 같은 순간들은 언제나 위로가 되고,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걷는 게 고되지만 그만큼 값지다고 느껴지는 건, 이러한 찰나의 순간들을 온전히 마주하며, 온몸으로 품기 때문이 아닐까.


 166.4km가 남았다는 표식을 지나자, 갈리시아 지역이 시작되었음을 상징하는 비석이 나타났다. 웅장한 크기의 비석이 마치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어느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멈출 생각이 없는 비, 오르막이 좋은 이유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오면서 빗방울이 굵고 거세졌다. 그리고 비는 눈으로 변신. 이럴 수가, 눈이라니. 스페인에서 눈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온몸으로 맞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는 반갑게 느껴지던 눈이었지만 이 곳에서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손님이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반지를 판다고 했던 가게에 도착했다. 안개도 많이 끼고, 몰아치는 바람으로 인해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사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지만 막상 보니 반지가 맘에 들어 빠르게 구매를 했다. 인심 좋은 주인아저씨 덕에 덤으로 배지도 받았더니 콧노래가 절로 났다.

갈비찜스러운 메뉴, 신의 한 수 였던 벽난로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눈바람이 온몸을 강타했다. 한참을 걸었더니 배가 고팠고, 어깨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쉴 곳이 간절했다. 벌써 두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지만, 바(Bar)의 B자도 보이지 않았다. 신발에 물이 가득 찼고, 레깅스는 하얗게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남은 거리고 뭐고, 도저히 못 걷겠다 싶은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아, 살았다!


 "와우, 힘들었죠. 벽난로에서 몸 좀 녹이고 젖은 옷들도 말려요." 순례자에 대한 주인의 배려였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서 벽난로 앞에 놓아두고, 바로 순례자 메뉴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먹고, 디저트까지 먹고 나서야 슬슬 정신이 돌아왔다. 아까는 도저히 못 걷겠더니, 어느새 마른 잔해들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배부르게 먹었던 점심, 자꾸 손이 가는 쿠키

 남은 거리 4km. 다행히 비가 잠깐 내리고, 바람만 불어서 더 젖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몽골의 이동식 주택인 게르가 연상되는 알베르게라 더 포근한 느낌이랄까. 작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은은한 갈색 불빛이 공간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따뜻한 실내에서 가만히 빗소리를 들으니, 온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 빗속에서 치열했던 하루를 돌아보면 아찔했지만, 멋진 풍경을 마주한 순간, 신발에 물이 차서 찰랑거렸을 때, 거짓말처럼 바(Bar)가 나타났을 때 등의 여러 순간들을 가만히 되짚어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쉽지 않은 하루였지만 좋은 순간들이 곳곳에 있어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지나고 보니 웃음이 나오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래도 내일은 축축한 우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원을 품어 봐야겠다. 비든 눈이든 부디 조금만 와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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