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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Feb 21. 2021

그래서 어쩔건데?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28일 차 : Sarria - Gonzar (31km)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게 얼마 만에 뜨는 햇빛인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언제 또 변덕을 부리며 비를 쏟아낼지 모르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혹여나 비에 젖을까, 안쪽 깊숙이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눈으로 한번 더 눌러 담았다.


 이게 도대체 몇 개야, 마을을 나가며 하나 둘 알베르게를 세었더니, 금세 열개가 넘었다. 역시 순례자들의 왕래가 많은 도시다웠다. 완주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거리가 최소 100km인데, 사리아가 딱 그 최소거리의 시작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곳에서 순례길을 시작하기도 하고, 이미 걸어온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100km 지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도시가 된다.


 그래서 사리아는 숙소나 편의시설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거주하는 사람들도 많다 보니, 확실히 생기가 느껴졌다. 일정에 여유가 있었다면, 하루 정도 더 머무르며 이 곳을 느껴보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하루 만에 별천지 같은 이 곳을 떠나야 하니, 평소보다 유난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비가 안오는 것만으로도 오케이, 여기서 보니 더 반갑구나 태극기야

 도시가 크다는 것은, 분명 볼거리가 많고, 알베르게를 선택하는 폭이 넓어진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바로 도시에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이 꽤 걸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행인 건 좀 더 시간을 들여 도시로 들어간 만큼, 그곳에서 머무른 달콤한 시간마저 배가 되었다는 것이다.


 쭉쭉 걷다 보니, 도시를 채 나가기도 전에 먹구름이 가득해졌고, 이내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졌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다. 짧지만 굵은 행복이 있었으니까. 빗줄기가 굵어질 즈음, 바(bar)가 나타났다. 럭키! 잠시 쉬면서 조각 케이크를 먹고, 어제 산 과자까지 순식간에 해치웠다. 온몸에 당이 매우 가득하다.


 여전히 내리는 비. 이제 우비를 벗는 건 의미가 없다. 비가 내릴 때가 훨씬 많기 때문에, 아니 대부분이기에, 입고 있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그래서 우비를 그대로 입고 있다가, 비가 멈추면 모자만 잠시 벗고, 비가 내리면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하늘과 땅의 푸름, 초롱초롱 빛나는 눈

 이제는 구름을 봐도 대충 어느 정도 비가 오겠지,라고 할 수 있는 내공이 쌓인 걸까. 가만히 하늘을 보니, 오늘은 제법 인심이 후한 편이다. 우왁, 하고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 살짝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니까.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포트 마린(Portomarin)에서 거한 점심을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왔는데, 생각지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마을 앞 쭉 뻗어 있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가려고 했던 음식점을 검색해 보니, 생각보다 거리가 좀 있었다. 이걸 가, 말아. 일단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마주한 풍경 덕분에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게... 보고 있는 게 맞나? 분명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의심스럽다. 웬 천국의 계단인지, 정말 높이가 까마득하다. 그 위풍당당함을 보니 단번에 기가 눌렸다. 누적된 피로를 짊어지고, 이 계단을 오르다 가는 정말 하늘로 가버릴 것만 같았다. 높디높은 계단을 오를 용기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다.


 마침 빗줄기도 굵어지고, 배도 고파서 근처 다리 밑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아이고, 죽겠다. 온몸에서 곡소리가 났지만 아껴 둔 초콜릿 과자를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하나를 손에 쥐고 바닥에 앉자마자 갑자기 비가 매섭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굴이, 온몸이 비로 뒤덮였다.


 양 옆이 뻥 뚫려 있는 다리 밑에서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물 범벅이 된 얼굴과 그 와중에 손에는 꼭 쥔 초콜릿 과자 하나,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이 무슨 소름 돋는 타이밍인지. 예기치 못한 이 상황이 너무 웃기기도 하고, 순식간에 흠뻑 젖은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배를 잡고 한참을 웃었다.


 날씨를 멋대로 제어할 수는 없다. 원한다고 해서 해가 뜨게 하거나 비가 내리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고, 선택을 내리는 일뿐.


 생각지 못한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상황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사방으로 불어오는 비바람은 단순히 얼굴과 몸을 적시는 것뿐만 아니라, 마치 나를 둘러싸고 있던 여러 걱정과 불안, 두려움들까지 씻어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며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큰소리로 한바탕 웃고 나니, 묘한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느낌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포트마린에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다리, 점점 작아지는 숫자

 빗줄기가 얇아질 즈음 배낭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오르막길이 지나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고, 오늘도 운 좋게 신발만은 지킬 수 있었다. 얕은 비가 오다 안 오다를 반복하고 나니 어느새 목적지 마을에 도착했다. 한데 길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날씨까지 흐려서 으스스한 느낌이 더해졌고, 얼른 알베르게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알베르게에 도착을 했는데,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어서 절망할 뻔했다. 그러나 이내 관리자가 와서 마음을 쓸어내렸다. 알고 보니 제일 먼저 도착해서 아직 순례자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 괜히 기분이 좋다. 뿌듯한 마음으로 씻으러 갔는데 웬걸, 처음으로 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칸막이 없이 뻥 뚫려 있는 샤워실이라 꽤나 민망할 뻔했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걸어서 정말 저녁을 기대했는데 역시 엄치척이다. 라면과 햇반, 그리고 김치의 조합은 더할 나위 없이 늘 단연 최고이며 사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먹기 전에는 양이 많아 보였는데 먹고 나니 순식간에 없어졌다. 제대로 밥도 못 먹고 온 설움이 한방에 치유되는 저녁이었다.


 침대에서 가만히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배도 부르고, 나른함까지 더해져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잠에 취하기 직전, 널어놓은 빨래가 떠올라 간신히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읏차, 얼른 빨래를 가지고 들어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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