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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Feb 28. 2021

그냥, 좋아서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29일 차 : Gonzar - Melide (33km)


 33km. 일단 앞자리가 3을 넘어가면 부담의 향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하루여도 벅찬데 무려 이틀 연속이라니. 뭐 이리 빡빡하게 걷나 싶다가도 누굴 탓하겠나.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거늘. 만일 누군가의 압력으로 결정된 일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참 아이러니하다.


 '나의 힘으로 순례길 걷기'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도 아니고, 단지 너무 오고 싶다는 마음에 스스로 정한 목표이다. 그래서 더욱 잘, 반드시, 해내고 싶다. 하루하루 걸으면서 때로는 거리가 길다, 다리가 아프다, 툴툴거릴 때도 있지만 결국 툭툭 털고 일어나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빨간불이 켜지는 거리임은 분명하다. 그만 멈추라며 발목과 발등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사방에서 울린다. 위로가 되는 것은 아우성이 가득한 적응시간을 거친 뒤, 금세 익숙해지고 원래의 템포를 찾는다는 것이다. 


 한 시간 만, 오늘만, 잘 걸어보자 하며 걸은 지 벌써 29일째, 어느덧 끝이 다가오고 있지만 잘 모르겠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800km를 걸을 수 있을까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남은 날은 이틀, 진짜 끝을 앞두고 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으 말도 안 돼. 아직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안에 있으면 내리는 비마저 반가워, 여기저기 탔지만 맛있었던 점심

 한참을 걷다 보니,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와, 여기 뭐야, 비 내리는 거 너무 예쁘지 않아?"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쏟아지는 비에 발을 동동 굴렀건만, 안에서 가만히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아늑한 공간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것은 참 좋다. 하지만 이내 들리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정신 차리자..."라는 한마디. 이크, 잠시 순례자라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 같다.


 비는 여전히 오고 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날이 밝아지고, 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작아지는 숫자들, 그림 같은 풍경  

 순례자가 되고 난 뒤로, 걸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한 번씩 되뇌는 주문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발에 물 차지 않을 정도로만 비가 내리길'이다. 이 주문을 걸기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때는 4일 차요, 처음으로 무자비하게 쏟아진 비에 옷과 신발 모두 쫄딱 젖었던 그 날부터였다. 그 후로 출발하기 전, 걷는 동안, 비가 올 때 등등 마음속으로 주문을 걸다시피 한다. 이외에는 더도 덜도 바랄 게 없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자주 보지 못했던 무지개를 이곳에서는 원 없이 본다. 무지개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묘한 설렘을 주는데, 그래서 한 번씩 떠오르는 무지개를 볼 때면 마치 동화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무지개가 뜬다는 건 비를 맞았다는 뜻이지만, 멋지게 모습을 드러낸 무지개를 볼 때면 언제 비를 맞았냐는 듯 아이처럼 신이 난다.


 이제 곧 마의 구간, 마을에 도착하기 전 3km, 다리는 돌덩이요, 몸은 천근만근인데 도착할 듯 닿지 않는 그 거리가 애매하게 지치게 한달까. 멈춰서 쉴까 하는 마음과 걸어야 해라는 마음이 늘 싸우는 구간, 한없이 쉬고 싶지만 지금 걷지 않으면 절대 갈 수 없는, 그런 마의 구간이다.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

 그래도 오늘은 한참을 기다렸던 뽈뽀(Pulpo)를 먹는 날이다. 이 곳에서 먹은 뽈뽀가 너무 맛있었다는 말을 듣고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제대로 뽈뽀를 먹은 건 처음인데, 간이 짭짤하긴 했지만 문어가 생각보다 엄청 통통해서 만족스러웠다. 입 안 가득 바다내음이 느껴졌고, 쫀득한 문어를 씹다 보니 행복함도 가득해졌다. 거기에 따뜻한 국물까지 더해지니 게임 끝. 말해 무엇하나, 오늘의 피로가 싹 사라지는 것 같다.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다양하게 못 먹었을 텐데 함께여서 배로 즐길 수 있는 순간이었다. 길을 걸을 때 일행이 있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바로 음식을 먹을 때다. 혼자 있을 때보다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고, 무엇보다 그 순간의 좋은 기억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는 것도 좋지만,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맛은 두 배, 아니 그 이상이 되니까.

찰나의 황홀한 순간

 산더미처럼 부푼 배를 두들기며 숙소로 돌아오니, 순례자가 한 명 늘었다. 간단한 안주에 와인 한 잔을 곁들이고 있던 순례자는 와인을 권했고, 자연스럽게 같이 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런데 웬걸, 조금 신기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바로 번역기 대화. 아주 간단한 영어만 소통이 되어서 번역기의 힘을 빌려 대화가 이어졌다. 한마디 한마디 서로 번역기를 쓰며 대화를 했지만, 신기하게도 대화가 꽤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는 폴란드에서 온 신부님이었고, 벌써 4번째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와우, 게다가 또 올 거라고.


 순례자들을 다시 이곳으로 이끄는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길 위에서 스친 많은 인연들이 있었지만 몇 번씩 순례길을 걸었다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신기했고, '무엇이 그들을 다시 이 곳으로 이끌었을까' 생각을 하곤 했다.


 종교적인 이유, 자신감을 얻기 위해, 오랜 꿈이어서, 아버지와 함께, 지인의 추천으로,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등등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걷든, 이곳에 선다는 건 결국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시작한다. 그리고 하루하루 길을 걷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그러다 보면 '다양한 나'를 마주하게 되고, 더불어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생긴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목적지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오로지 걷는 일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순례길을 걷는다는 건 자신이 던진 질문에 온몸으로 답을 찾아가고, 그 시간 속에서 인생의 여러 맛을 보는 소중한 과정이 아닐까.


 몇 번씩 이 길을 걷는 사람도 있고,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사람도 있다. 29일째 걸은 지금, '아, 다시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이 곳이 정말 좋아서 언젠가 다시 오고 싶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 마음이 더욱 진해지고 있다. 언제 어떻게 다시 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때를 위해서는 우선, 지금 여기 있는 이 순간부터 잘 마무리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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