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31일 차 : Calle - Santiago de Compostella (30.64km)
세 시간 정도 잤으려나, 잠이 오지 않았다. 자려고 눈을 감아도 계속 산티아고가 그려졌고, 그간 지나온 흔적을 하나 둘 그리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산티아고 도착'
또렷하게 적혀 있는 일정을 보고, 정말? 진짜? 에이 설마, 하며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한참 동안 일정을 쳐다봤지만, 그럴수록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질 뿐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어느덧 위협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둘러 바(bar)를 찾았고 운 좋게 한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달랑 긴 테이블 하나, 그리고 휑한 공간. 이런, 안타깝게도 서있는 자리가 전부였다. 다리가 천근만근인데... 뭐, 앞뒤 가릴 처지는 아니니까.
거의 매일 먹다시피 한 초코빵과 카페콘레체, 잊을 수 없는 공간
보통 때라면 다시 길을 나설 시간이었지만, '가볼까'하는 머리와 '머무를까'의 마음이 줄다리기를 하는 탓에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가? 말아?'
고민이 길어질수록 떠날 의욕이 계속 사라졌고, 이 곳에 좀 더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한없이 커지는 마음을 뒤로 한채 떠난다면, 분명 십리도 못가 후회할 게 뻔했다.
'그래, 좀 더 머무르자.'
일단 들어가면 그 공간이 주는 느낌이 너무 특별해서 나가고 싶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이곳이 그랬다. 한적하고 고요한 공기, 선곡에 따라 부드럽게 전환되는 분위기, 포근하게 느껴지는 온도가 너무나 조화로운 곳이었다. 그래서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때로는 은은한 멜로디가, 때로는 몸을 들썩거리는음악이 흘러나왔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더해졌고, 마치 한 편의 합주를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순간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머무르길 참 잘했다.'
잠시 멀어질 배낭, 드디어 산티아고 도착
배낭을 어깨에 얹고 묵묵히 걸었다.
'이 여정은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상황을, 마음을 따라 참 많은 선택을 했다. 돌이켜보면 만족스러운 선택이 있고, 안타깝지만 그렇지 못한 선택도 있다. 그러나 좋든 싫든, 만족하든 만족하지 않았든, 작고 큰 선택들이 모여 나를 이루었고, 결국 그 선택들이 모여이 길 위에 서게 되었다.
과거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안에 남아 또 다른 선택을 이끄는 힘이 되는구나
여행을 떠나기 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고 마음이 답답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으며 멈춰 섰다. 그렇게 이 길에 닿았다. 그리고 고민스럽고 답답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길에 올라 마음껏 헤맬 수 있었다. 그 고민들이 없었다면, 결코 지금의 값진 경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한 표정이 가려져 있다.
30일간의 여정이 끝이 났다. 마을에 도착하기 전부터 실실 웃음이 나오더니 성당 앞에 서자마자 함박웃음이 터졌다.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
"와... 정말 왔다."
비가 내려서 아쉬웠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비가 오는 대로 사진을 찍고 이 순간을 만끽했다. 순례자 사무소에 가서 증서도 받고 나니 정말 해냈다는 게 더 와 닿았다. 동키 한 번 없이, 점프도 없이, 처음에 목표했던 그대로. 아주 깔끔하게 해냈다는 사실에 기쁨이 차올랐다.
산티아고 성당, 시원한 맥주 한 잔
800km를 걸었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고 엄청난 변화가 생긴 건 아니다. 다만, 조금 더 단단해졌다. 길을 걸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 보게 되었고, 알아갔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순례길에서 몸은 고단했지만 그 이상으로 행복했다. 하루하루 행복한 순간들이 늘어났고, 의심과 걱정으로 짙은 안개가 드리우던 마음에도 해가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감과 애정이 시나브로 채워졌다. 결국, 길은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비록 순례길 여정은 끝났지만, 이제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스물 다섯 끝자락에, 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고, 이제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앞으로 이렇게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조금 더 나답게, 후회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