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30일 차:Melide - Calle(22km)
평소보다 오래 잤는데 이게 웬 팬더람. 다리는 말썽이고, 온몸은 마치 물을 듬뿍 머금은 수건 같다. 내딛는 한걸음에 괜히 중력의 영향까지 느껴지는 것 같고. 왠지 처지는 기분까지 들어 긍정의 기운을 주섬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직 하루가 길다.
8km 정도 걷고 나니까 발도 아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어 졌다. 곧 바(bar)가 나왔고, 그곳에서 잠시나마 꿀 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다시 길을 나설 때 즈음, 다행스럽게도 비가 그치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드디어 해가 나왔다. 축 처져있던 구부정한 몸에 햇살이 닿으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 알베르게 다 안 하는데?"
"에이 설마."
"진짜야. 어떡하지?"
이런, 원래 목적지에 있는 알베르게가 모두 닫아서 상황이 퍽 난감해졌다. 어쩔 수 없이 30km를 갈지, 22km를 갈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걸 어찌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30km를 간다고 해도 숙소가 불안정하고, 무엇보다도 거기까지 갈 체력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과감히 22km로 결정했다. 그래, 오늘은 좀 쉬고, 약간의 고통은... 내일의 나를 믿자.
뜻하지 않은 휴식이라서 더 행복한 걸까.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라고 하기에는 어째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굶을 생각이었지만 전자레인지가 있어서 북엇국과 햇반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뜨끈한 북엇국을 생각하니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굶을 생각을 한 애가 맞나 싶다.
느긋하게 다이어리도 쓰고, 영화도 보고, 뒹굴거리고, 따뜻한 밥도 먹고, 순간을 더 진하게 만들어주는 맥주 한 잔까지, 여유로운 시간들이 이어졌다.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에 여유롭게 쉴 수 있는 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 그곳에 숙소가 없었던 건 신의 한 수였다.
처음에 계획했던 순례길 일정은 32일이었는데, 예정보다 하루를 더 앞당기게 되었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걸어야 할 것 같은데 내일이면 끝이 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산티아고의 문턱에 다가오니, 세 번이고 다섯 번이고,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순례자라는 말도 낯설고, 매일 걷는다는 것도 어색했다. 그러나 낯설고 어색했던 순간들이 어느덧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서툴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니 하루가 이틀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새 30일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하는 순간이 성큼 다가왔다.
벌써 시원섭섭하다. 돌이켜보면, 처음으로 프랑스길을 택한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10월부터 11월이라는 시기도 그렇고. 비도 맞고, 눈도 맞았는데도? 하고 물어도, 대답은 완전 예스다. 다양한 순간들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쨍쨍한 햇빛 아래서 물의 소중함을 느껴보고, 대차게 비도 눈도 맞고,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았으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추억도 만들었다.
순례길은 항상 다양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주었고, 그 순간들은 늘 다채롭게 빛이 났다. 예상치 못한 상황들도 있었지만 언제나 웃음이 흘러넘쳤다. 적어도 내게는, 이 길에서 한 모든 경험이 반짝였고 특별했다. 내일이 지나면 잠시 걷는 생활은 중단하겠지만, 이 기억만큼은 항상 남아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