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27일 차 : Fonfria - Sarria (26.5km)
어젯밤에 품었던 소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로 오늘도 비와 함께 하는 하루다. 어제 산 바나나를 먹으며, 이대로 계속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비바람에, 눈에, 게다가 추위까지 오들오들 떨었던 어제를 떠올리며, 오늘은 특별히 등산바지를 챙겨 입었다. 아무래도 레깅스보다 따뜻하고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런, 비가 많이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바지가 물 범벅이다.
순례길을 걷는다고 새롭게 산 바지이기에, 비쯤은 괜찮겠지 싶었는데... 망했다. 등산복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비도, 눈도 막아줄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부른 참사였다. 아무래도 오늘도 순탄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성수기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니면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을 많이 지나는 건지. 사람들도 잘 보이지 않고 휑한 마을이 참 많다. 비도 오고, 쉴만한 곳이 마땅히 보이지 않아서 바(Bar)가 간절한데, 아무것도 없는 유령 마을만 계속 나왔다.
바지만 축축하면 참고 걸으면 되는데, 양말까지 물이 번지고 이제는 신발까지 위험해졌다. 옷을 갈아입을만한 곳이 필요했다. 물이 신발까지 번지기 전, 운 좋게 한 곳을 발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Donativo라는 글씨가 쓰여있는 큰 책상이 있었고, 그 옆에는 직접 짠듯한 모자와 옷들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여기는 뭘 하는 곳이지. 처음 보는 광경에 잠시 멍했다. 아 맞다, 바지. 일단 바지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이 곳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흔쾌히 자신의 방을 알려주면서 쓰라고 했다. 젖은 바지를 갈아입었을 뿐인데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밖에 나와서 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주변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순례자들을 위해 기부(donation)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다. 크게 펼쳐 놓은 책상 위에는 계란, 바나나, 과자, 우유 등 순례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고, 심지어 커피도 원하면 만들어서 가져다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 곳을 운영하는 운영진이 꽤 있었고, 그들끼리의 친분이 꽤 두터워 보였다.
그들을 가만히 보는데 볼수록 신기했다. 한 명이 기타를 연주하면, 다른 사람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가 오랜만에 찾아왔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너무 행복하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충격적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이 세상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다 못해 행복이 얼굴을 뚫고 나왔고, 웃음이 가득한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광경이었다.
그들은 누구든, 그곳의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돈을 받지도 않는데 직접 만든 커피도 가져다주고, 원하는 만큼 편히 쉬다 가라고 하는 말에 정말 감동을 받았다. 덕분에 책상 위에 놓여있던 따뜻한 계란 하나를 먹고 양심껏 돈을 넣고 나왔다.
"난 저 사람들이 너무 대단한 거 같아."
"왜?"
"저 사람들 얼굴 봤어? 진짜 행복해 보였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그것도 거기 있는 사람 모두,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말이야. 엄청 충격을 받았는데 이게 참, 기분이 좋아.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이게 머리로는 '세상에는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고, 개인마다 원하는 삶의 기준도 다 다르다.'는 걸 알고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고,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니까. 와, 잠깐 다른 세계를 다녀온 것 같아."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흥분을 하며 말들을 쏟아냈다. 길을 걸으며 몇 번을 다시 생각을 해봐도, 정말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순례길에서 이 곳을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고, 또 감사했다. 좋은 기운을 받고 걸으니 발걸음도 가벼웠다.
계속 내리막길이라서 무릎이 좀 아프긴 했지만, 코스는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비가 멈춰서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열심히 걷다 보니 어느새 사리아에 도착했고, 프로검색러의 맛집 검색으로 맛있는 피자를 먹고, 마무리로 샹그리아도 한 잔 했다.
슬슬 침대가 그리워져서 곧장 알베르게로 들어왔다. 앞으로도 종종 생각이 날 것 같은 특별한 날을 보냈기에 더 알찬 느낌이 드는 하루다. 내일은 오래 걸어야 하는 날이기에, 평소보다 일찍 마무리하고 그만 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