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24일 차 : El Acebo - Cacabelos (31.27km)
밖에서 조금씩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이층 침대에서 내려와 짐을 챙겼다. 대략 반 정도 챙겼을까, 옆에서 자고 있던 순례자가 대뜸 화를 냈다. "다른 사람들 다 자고 있는데 조용히 좀 해요. 아니면 나가서 하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번 더 짜증을 내고, 다시 잠을 청하는 순례자를 보니 어안이 벙벙했다.
어제 같이 이야기를 할 때는 분명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짜증을 낼 때 보니 같은 사람이 맞나 싶었다. 일단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생각할수록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시계를 봐도 당연히 순례자들이 준비를 할 시간이었고, 함께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뒤늦게 머리에 스팀이 피어올랐지만 이런 일로 시작을 망치고 싶지 않아 '똥 맞았네. 액땜했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장갑도 끼고, 넥워머에, 패딩에 바람막이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지만, 사방으로 부는 칼바람은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원수라도 졌나 싶을 정도로 불어대는 바람에 눈물까지 핑 고였다. 배낭을 메고 무겁게 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선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서 걷고 있던 아저씨가 부는 휘파람 소리였다. '아니, 이 날씨에 휘파람까지 불면서, 저렇게 빨리 걷는다고?'
콧노래를 부르며, 즐기면서 걷는 아저씨가 멋있어 보였다. 춥고 날씨가 흐린 탓에 기분도 같이 가라앉았는데, 아저씨를 보니 다시 힘이 났다. '어차피 날씨야 뭐 어쩔 수 없고, 이왕 가는 거 즐겁게 가자'는 마음으로 힘차게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이 나왔다. 아침을 먹기 위해 오믈렛을 시켰는데 웬걸, 분명 작은 걸 시켰는데, 혼자 접시를 다 차지하고 있는 오믈렛을 보니 웃음이 터졌다. 간단하게 먹으려고 한 아침 식사가 거하게 변했다.
그 후에는 자비 없는 내리막길이 펼쳐졌다. 내려오는 길이 미끄럽다고 했던 주서기의 말을 백 퍼센트 이해하며, 작은 보폭으로 계속 걸었다. 무릎에 상당히 무리가 가는 길이었다. 무릎과 종아리에서 느껴지는 지끈거림을 잊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폰페라다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꽤 보이기 시작했다. 대도시답게 관광하는 사람들도 꽤 있어 보였고, 마을에 활기가 넘쳐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끝이 보이는 순례자 여권을 다시 발급받을 겸 안내 센터에 들렀다.
성당 안으로 가면 된다고 해서 들어왔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배낭부터 내려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어린 남자아이의 안내에 따라 안쪽 사무실에 들어가 여권을 발급받았다. "지금 걷는 이 순간들이 좋은 경험이 되길 바랄게요"라는 신부님의 따뜻한 말이 차가웠던 온몸에 온기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괜히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기 전에, 배낭을 챙겨 마을을 빠져나왔다. 운 좋게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도 다시 사고, 은행에 들러 돈도 뽑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남은 건 정말 잘 걷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역시 31km는 만만치 않다. 시골길 같은 곳들을 지나고, 또 지나가다 보니 슬슬 졸려워지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게다가 발끝부터 허벅지까지 뻐근함이 느껴져 중간에 한 번 더 쉬어 가야 했다.
달달한 초코칩 쿠키의 힘으로, 드디어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을 들어오고서도 꽤 안쪽으로 숙소가 있어서 마지막 힘을 짜내어 걸었다. 시계를 보니, 거의 8시간 만에 끝이 난 하루였다. 아이고, 종아리도 당기고, 발바닥에서는 불이 나는 것 같다.
저녁을 먹긴 했지만 뭔가 부족해서 주변에 있는 케밥 가게에 들렀다. "혹시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묻는 주인아저씨께 그렇다고 하니 "잠깐 기다려봐요. 노래 틀어줄게요." 하시고는 자리가 있는 쪽으로 스피커를 돌려주셨다. Almost paradise~ 너무나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라니, 생각지도 못한 곡 선정에 깜짝 놀라 아저씨를 쳐다봤더니, 씩 웃으시며 즐기라고 하셨다. 자리를 떠날 때까지, 한국 음악을 틀어주신 아저씨 덕분에 잊지 못할 케밥의 추억이 생겼다.
따뜻한 마음들로 인해 더 기억에 남는 하루였다. 비록 아침에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하루를 통틀어 봤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하루였다. 아침의 일과 날씨로 인해 좋지 않은 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좋다고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이 생겼을 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별거 아니야.' 하고 잘 넘기고 나니까 좋은 일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매일이 좋은 날이 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없고, 때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기는 일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날이 있는 만큼 그렇지 않은 날도 많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의 하루 속에는, 늘 무언가 좋은 일이 있다. 약간의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본다면,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매일 좋은 날이 될 수는 없겠지만, 좋은 일은 매일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