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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讀用書> 사람 보는 눈이 인생을 결정한다

<판단-2> 사람을 읽자, 나를 읽히자

by 조창완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대부분이다. 유치원의 놀이친구에 상처를 받는 이도 있다. 학교에 가서는 만만치 않은 공부적수를 만나기도 한다. 중학교에 가면 나를 괴롭히는 친구도 있을 수 있다. 고등학교에서 만나는 교사들은 진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후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없다.

그런데 사람관계는 두가지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있고,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관계도 있다. 부모님은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자신이 태어날 수 있는 집은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에 들어가서 만나는 상사들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친구 관계들은 선택적인 관계다. 만나기 싫으면 안만나도 된다.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관계라고 해도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막 태어나서야 모르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어른들을 생각하는 속 깊은 경우도 많다. 어려서부터 어디에 들어가면 빛나는 아이들은 분명히 있다. 그것이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길러진 것을 수 있다.


그럼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 우선 진심이다. 그 진심은 나이, 성별, 인종, 국가와 무관하다. 상대에 대한 진심은 공기와 같아서 금방 알 수 있다. 나는 중국에 관해 강의할 때 한 만남을 자주 이야기 한다.

2004년 경에 KBS에서 월드넷이라는 국제 네트워크망을 오픈했다. 내가 중국 통신원이어서 나에게 베이징인민라디오방송국(北京人民广播电视台) 사장의 축하 메시지를 받아오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나는 미리 연락을 해두고 방송국을 찾아서 30분 정도 축하인사를 녹화했다. 그리고 돌아가려는데 사장이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먹을 갈더니, 글을 하나 써주었다. 써준 글은 ‘혜풍화창’(惠風和暢 따듯한 봄바람이 따듯하게 불어온다)이었다. 옆에 ‘창완 선생 보벽’(暢完先生補壁)이라는 문구도 넣어주고, 자신의 이름(汪良)도 적어줬다. 보벽은 잘 쓰지 않는 말인데, 강원대 김풍기 교수님이 졸필로 초라한 벽을 보완해달라는 겸양의 표현이라고 한다. 왕량 사장이 내게 써준 글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書)에 나오는 한 문구다. 이 글을 써준 것은 내 이름에 있는 화창할 창(暢)을 연결한 것이다. 잠시 지나가는 외국의 손님을 불러서 그런 글을 써주는 정성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분은 실제로 유명한 서예가다. 베이징서예가협회 부주석을 지냈고, 전인대 대표도 한 분이었다. 검색해 보니, 이 분의 서화는 이미 수천만원짜리도 있을 정도였다.

혜풍화창.jpg 내 작업실에 걸린 왕량 선생의 글씨. 이 족자를 보면서 내가 과연 타인들에게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는 가를 고민한다.


이렇게 유명한 분만이 아니다. 내가 중국으로 오기로 결정한 것은 1998년 취재차 왔을 때 창지앙 여객선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느낌 때문이었다. 낯선 외국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려하고, 뭐라도 대접하고 싶은 것들에서 누구에게나 느끼는 정을 알았기 때문이다. 중국에 살아도 큰 외로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가 나를 존중하고, 호감이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작은 태도 하나하나에서 그 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사람들은 수십년만에 바뀌는 정권 속에서 살아온 긴 역사가 있다. 상대의 태도를 잘못 살피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것이 DNA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에 관해 강의할 때, 중국과 무슨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을 하던 상대에게 진심을 다해야만 작은 일이라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만이 아니다. 자신이 만나는 중국 유학생이나 중국 관련 글에 대한 댓글로도 중국은 상대를 알 수 있다.


그럼 사람들은 궁금할 것이다.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면 되는 건가요? 나는 첫 번째로 의리가 있는 가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람 대접을 받고 싶다면 의리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의리는 어떤 사안 앞에 일관되게 한가지로 말하고, 하나의 관점을 지키는 것이다. 물론 입장을 바꿀 수 있는데, 그럴 때는 그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나는 정치인도 진보에서 보수로 정당을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그 입장을 철저히 설명하고, 향후 자신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설명하는 것은 기본 예의라는 것이다. 또 실수가 있다면 진솔하게 사과하는 게 기본이다. 마음대로 정치적 입장을 옮기면서 성공한 정치가는 없다. 김대중 대통령도 정치자금수수설로 곤혹을 치룬 적이 있다. 군부정권으로서는 모두에게 자금을 주어, 문제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여야를 안 가리고 정치자금을 주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은 이후에 정확하게 사과를 시작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의리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 인생 여정 전반을 두고 판단하면 된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노무현 대통령은 연설에서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적지만 아주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을 제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라는 연설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현재의 친구 관계는 한가지 만은 아니다. 직접 보는 친구부터 페이스북 친구처럼 생면부지의 친구도 있을 수 있다. 생각해보면 나도 적지 않은 줄기에서 친구를 두고 있다. 고향 친구부터 학교 친구, 사회 친구까지. 그런데 친구는 한번 만나는 사이는 아니다. 두고두고 만나면서 자신과 맞는가를 확인하면서 유지하는 게 친구다. 만약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진짜 친구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5000명을 채우지 않고 유지하는 내 페이스북 친구도 곧 나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대선 캠프에 있다보면 친구 관계에서도 껄끄러운 부분이 생길 수 있다. 때문에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고, 나 역시 주의한다. 또 친구 간에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도 만고의 진리이니, 가능하면 피하는 것을 권한다. 물론 그 결정은 자신이 한다.


세 번째는 경청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관계든 말을 공평하게 반반 나누어서 하지는 않는다. 텔레비전 예능을 보면 알겠지만 수많은 공간의 말의 전쟁터다. 작은 틈을 파고 들어, 어색하지 않게 자기 말을 집어 넣어야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대화에서 경청이 중요하다.


경청은 맞은 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경청을 통해 대화 상대와 신뢰를 만들수 있고, 상대는 좋은 경청을 통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말하면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효과적인 경청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지 않는 것이다. 또 자신과 견해가 달라도 일단 수용한다.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오감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람들은 즉문즉설로 많은 공감을 얻는 법륜 스님이 말하는 것의 달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법륜 스님은 경청의 달인이다. 스님은 각양각색의 질문자의 화법을 중간에서 잘 분석해서 같이 하는 이들에게 정리한다. 때로는 질문의 요지가 없다고 꾸짖기도 하지만 이는 같이 듣는 사람들이 질문을 같이 이해해야 답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경청하는 과정을 통해 상대방의 심리상태, 질환, 호흡까지 분석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영업의 달인들도 마찬가지다. 세일즈를 잘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품을 잘 설명해서 물건을 팔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상대가 필요한 물건을 제대로 분석한 후 맞는 솔루션을 제시하기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것이다.


미래의 사라지는 직업중에 가장 위태로운 일로 미래전문가들은 텔리마케터를 뽑는다. 이는 두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사람들이 사람과 직접 마주해 대화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바로 찾아주는 것이다. 인공지능(AI)은 위의 두가지를 쉽게 해결해 준다. 기계라 생각하니 부담도 덜하다. 더욱이 필요한 물건은 모든 데이터가 입력되어 있으니, 순식간에 찾아서 답변해줄 수 있다. 그 만큼 사람 간의 소통은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를 읽히는 게 삶이다

요즘은 자기 PR 시대라는 말이 나온 것은 수십년이 됐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기회를 얻기 쉽지 않다. 과거라면 그럴 수 있는 방식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수단은 수없이 많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같은 SNS는 물론이고 자신의 콘텐츠를 축적할 수 있는 블로그 등도 활용할 수 있다.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SNS를 통해 자신을 보여줄 수 있다. 물론 SNS는 체계적으로 콘텐츠를 정리할 수 없기 때문에 블로그를 활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필자의 블로그도 이런 특상을 충분히 반영한다. 일상을 이야기하는 게시판은 물론이고 서평, 여행, 기고, 칼럼, 저서 등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쉽게 나를 읽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SNS나 블로그는 자신의 보여줘야 하지 않을 모습도 드러내는 약점이 있다. 사실 요즘은 네티즌 수사대로 활동하는 이들이 많아서 개인 정보가 공개되는 것은 순간이다. 따라서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스스로 해야 한다. 아무리 선의로 활동한다고 해도 나중에 일부를 발췌해서 문제를 제기하면 쉽게 빠져나가기 힘들다는 것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젊은 시절의 글로 인해 곤란을 겪은 홍준표 의원이나 탁현민 비서관 등의 사례를 타산지석 참을 필요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 역시 엄청나게 많은 글과 사진 중에 무엇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지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없다.


요즘 필자는 대선 캠프에서 뛰고 있다. 나름대로 철학이 있어서 이 캠프를 선택해서 왔다. 하지만 지인들 가운데 필자와 같은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들에게는 마음이 걸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내 신념에 따라서 관련 글을 쓴다. 당연히 나에게 실망했다는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받는 게 옳은 것인가도 고민한다. 아울러 나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이나 사람을 보는 사람이라면 굳이 모든 면에서 친해질 필요가 있는가도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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